목회자는 죄와 은혜를 설교한다. 죄책감에 빠진 사람은 회복되기를 바라고,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은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목회자의 예상과는 달리,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죄를 깨달아야 할 사람은, 회개의 과정 없이 은혜의 혜택을 누린다. 은혜의 말씀이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변질된다. 

 

죄책감에 빠진 사람은, 은혜를 배제하고 죄에 짓눌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무시한 정죄의 칼날로 변질된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서로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이다. 

 

말씀 자체의 결함이 아니다. 듣는 자의 결핍이다. 결핍의 필터로 하나님의 말씀을 걸러듣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이다. 

 

자기 의에 빠진 사람은 필터의 구멍이 크다. 죄에 대한 지적을 하면, 구멍이 커서 죄책감이 숭숭 빠져나간다. 

 

자기 정죄에 빠진 사람은, 필터가 반대로 뒤집어졌다. 죄를 걸려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걸려낸다. 은혜를 걸러내서 폐기처분하고, 죄책감만 남긴다. 

 

필터의 방향은 순방향이어야 하고, 필터의 크기는 적정해야 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죄를 망각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은혜를 배제하는 사람인가? 

 

자기 합리화에 빠진 사람에게 말한다. 당신은 죄인이다.

 

자기 정죄감에 빠진 사람에게 말한다. 당신은 의인이다. 

 

“죄와 은혜”는 분리될 수 없다. “죄와 은혜”는 두 단어 결합이 아니라, 하나의 단어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죄인이거나, 의인일 수 없다. 당신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며,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회개 없는 은혜는 없다. 회개 없는 은혜를 말한다면, 그것은 이단이다. 은혜 없는 신앙도 없다. 은혜 없는 신앙은, 종교이며 율법이다. 

 

자기 합리화에 빠진 사람,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라. 자기 정죄에 사로잡힌 사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 두 사람 모두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