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이삭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이상했어요. 항상 밝게 웃던 아버지가 웃음을 잃으셨거든요. 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내 앞에서 웃음을 잃은 적이 없어요. 오죽하면 내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었겠어요. 

 

웃음을 잃은 아버지는 며칠 동안 시름 시름 앓아누우셨어요. 그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러 가자고 말씀하셨죠. 

 

몸도 안 좋으면서 그 높은 산을 어떻게 올라가려 하는지 걱정스러웠어요. 가는 내내 아버지는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했어요. 산이 가까워질수록 아버지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죠. 

 

산 입구에서 아버지는 종들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했어요. 나와 아버지, 단둘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죠. 나는 불안했어요. 아버지가 평소와 달랐거든요. 하나님께 바칠 어린 양이 없었어요.  

 

나는 그제야 알았죠. 아버지가 나를 죽여서 바치려 한다는 사실을. 미치도록 두려웠어요.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죠.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온몸이 꽁꽁 묶일 때까지 나는 반항하지 않았어요. 제단에 누워 눈물만 흘렸지요.

 

아버지는 내 눈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칼을 뽑아들고 내 목을 찌르려 했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췄어요. 이렇게 끝이구나 생각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였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역시 그랬어요. 하나님이 아버지를 시험하셨던 거예요. 아버지가 아무 이유 없이 날 죽일 리 없었어요. 아버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며 날 묶었던 끈을 풀어줬어요. 나를 힘껏 끌어안아주시며 엉엉 우셨어요. 날 안아주신 아버지의 품을 잊을 수 없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도 그 품이 그리울 정도니까요. 

 

하나님은 나 대신 숫양을 준비해주셨어요. 날 대신해서 죽은 숫양 덕분에 내가 살 수 있다는 감정이 정말 묘했어요.  

 

사람들이 묻더군요. 어떻게 어린아이가 모든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냐고요? 오해하고 계세요. 나는 그렇게 어리지 않았어요. 영화에서 보니까 내가 꼬마 아이던데, 맞나요? 사실이 아니에요. 

 

나는 청년이었어요. 산을 오를 때, 장작을 짊어진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예요. 나는 아버지보다 힘도 세고 발도 빨랐어요. 

 

아버지는 백 살에 나를 낳았어요. 아버지가 날 힘으로 결박한 게 아니라, 내가 반항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먼저 제단에 올라가 눕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힘으로 나를 제단 위로 올릴 수 없었지요. 

 

사람들이 내게 가끔 물어요. 아버지가 당신을 죽이려 했는데, 상처받지 않았냐고. 대답은 간단해요. 상처받지 않았어요. 그날 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하나님이셨어요. 처음으로 하나님 목소리를 직접 들었죠.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이었어요.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상처받은 채 고통받으며 살았겠죠. 

 

내가 서 있었던 그 자리는 상처와 눈물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어요.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 나의 후손들은 이 산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했어요.    

 

나는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주인공처럼 보일 거예요. 이 사건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에요.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죠. 

 

일의 시작도 하나님이고, 일의 마침도 하나님이에요. 나와 아버지는 그저 무서웠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나도 당신처럼 두려웠어요.

하나님이 살려주셨죠. 

 

<창세기 22장 7절>

이삭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했습니다.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이삭이 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