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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작가, 상담자

나는 김유비입니다

알코올 중독자 가정에서 자라며 열등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십대에 절망의 끝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했다. 이후 목회자의 길을 걷고, 결혼도 했지만 치유되지 못한 내면의 상처로 가족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자신이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된 것에 절망하던 중 하나님의 은혜와 아내의 전폭적인 사랑으로 회복되었다. 그는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로부터 개척을 지원 받아 안정된 목회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상처 입은 ‘한 영혼’의 울부짖음을 외면할 수 없어 아무것도 없이 홀로 ‘들어주는 사역’을 시작했다. 안정을 버리고 택한 그의 사역 길을 주님이 인도하셔서 현재 많은 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강의하고 있으며, 갓피플TV, CTS 기독교 방송을 통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디아스포라에 치유 상담 방송을 하고 있다. 

나는 상처 많은 사람이다

상처를 숨기고 괜찮은 척 살아왔다. 남편이 되었고, 아버지가 되었다. 목사가 되었고, 상담자가 되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석 달 동안 안아주지 못했다. 내가 아기를 품에 안으면 아기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아이를 사랑했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나 때문에 아내는 많은 상처를 받았다. 교회에서는 열정 있는 목사처럼 행동했지만, 그녀에게는 일 중독자 남편에 불과했다. 부부싸움이 잦아졌고, 나는 화가 나면 소리치고 위협했다. 괜찮은 척 버티며 살아왔지만, 결혼 3년 만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는 이혼을 결심했고, 양가 부모님에게 알렸다. 내 안의  상처는 덧나 고름으로 범벅이 되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할 때, 내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수치스러워 숨기고 싶었다.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 알코올 중독 아버지, 교회에 지나치게 몰두한 어머니, 폭력, 학대, 우울증, 자살충동, 방황한 청소년기.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내겐 오직 현재만이 중요했다.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고통스런 과거를 살아왔지만, 아내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내게 결혼이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선포하는 선언식이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보증금 5백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허름한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사역했던 교회는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재정적인 지원이 부족했다. 월세 내고, 아이 키우고, 신학대학원에 다니려면 돈이 필요했다.

낮에는 대학원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사역을 했다.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견디고 견뎠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아무리 노력해도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어느 날, 아내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월세가 다섯 달이나 밀렸어. 기저귀는 떨어진 지 오래고, 분유는 어제 떨어졌어.”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아내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여보, 내가 미안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그러나 당시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아내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나도 최선을 다하잖아.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다 끝났어! 더 이상 못하겠다고!”

내 안의 상처가 미치도록 아파서 아내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그때 하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한 마리 짐승처럼 보였다. 나 자신과 약속했었다. 절대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그런데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 내 모습에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어 울고 있는 아내를 내버려둔 채 집을 뛰쳐나왔다.

사흘 밤낮을 차 안에서 지냈다.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기도도 할 수 없었다. 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없었던 탓인지 온몸에 열이 났다. 식은땀이 몸을 적셨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한 달 전, 어머니로부터 이혼의 법적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 꼴이 우스웠다.

‘내 부모의 결혼이 끝난다. 내 결혼도 끝나간다….’

아버지가 이메일로 A4 용지 60장이 넘는 긴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는 살아온 인생에 대해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시절과 사춘기 등.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은 어머니가 친가 쪽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말이 전부였다. 아버지 입을 통해 직접 전해들은 건 없었다.

아버지가 직접 써내려간 편지를 읽으면서 그가 나인지, 내가 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가 불쌍했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 역시 상처의 희생자라는 것, 상처 때문에 희생자이면서 가해자가 된 것을.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희생자일 수 없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에게 가해자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외모뿐만 아니라 상처마저 닮아버렸다.

내 상처를 직면하고, 일어서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나는 편지를 종이로 출력했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쇠문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아내가 문을 열었다. 나는 말없이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섰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었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종이 뭉치를 식탁에 내던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읽고 싶으면 읽고, 버리고 싶으면 버려.”

나는 마음속으로 애원했다.

‘여보, 제발 버리지 말고 읽어주세요.’

아내와 눈을 마주할 수 없어서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신경이 예민해지니 작은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아내가 식탁으로 걸어가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앉는 소리,  모두 생생하게 들렸다. 한 장씩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다 읽은 후, 아내가 무슨 말을 할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왜 읽으라고 한 건지 모르겠네.”

‘이렇게 말하면 어쩌지, 그러면 나는 정말 어떻게 하지….’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순간 밖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내지 않고 가만히 눈물을 흘리는 소리. 다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방문이 열렸다. 아내가 다가와 이불을 들추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범벅인 얼굴로 그녀가 내게 말했다.

“여보, 살아줘서 고마워.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견뎌줘서 고마워.”

마음속에서 번개가 치고, 폭풍이 일어났다. 아내의 눈물이 내 얼굴에 떨어져, 내 눈물과 섞였다.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 품에 안겨 아기처럼 밤새도록 울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 나에게 그 한 마디를 건네주었다면, 나는 그토록 오랜 시간 고통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내를 통해, 내 상처를 온전히 수용해주셨다. 그날부터, 나는 내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비록 상처투성이 목사였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상처받은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싶다. 예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치유하는 삶,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김유비닷컴을 시작한 이유

무모한 도전을 시작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비현실적인 꿈을 좇는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은 나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나는 어둠 속에 갇혀 버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뚫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은 글을 쓰는 일 뿐이었다. 나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다. 내 글을 읽는 사람과 마음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세상은 고요했다. 박수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고요함은 머지않아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두려움은 밀물처럼 순식간에 불어나 내 인생을 덮쳤다. 나는 좌절했고,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다.

내 나이 스물다섯, 개척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대학 다닐 때, 만난 목사님은 나를 아들처럼 사랑해주셨고, 함께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12년이 흘렀다. 목회 처음부터 바닥이 드러난 채로 사역을 시작했다.

담임목사님, 사역자, 성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목회를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투적인 말이 아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교회 식구들은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진작 목회가 아닌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참아주고, 견뎌주고, 이해해준 덕분에 모난 성품으로 잘 견뎠다.

목회하면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앞날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고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사역했던 교회는 교회 개척 운동으로 시작된 교회였다. 개척 초기부터 담임목사님은 또 다른 교회를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목사님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물러서지 않고, 성도들과 함께 지금까지 두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나는 한국교회에서 보기 드문 일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축복을 누렸다.

시간은 화살처럼 빨랐고, 결국 내가 다음 교회 개척에 대한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교회 개척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사역이지만,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왜?” 라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대답을 못했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개척을 보류했다. 시간이 지나, 또 다시 개척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교회 개척을 하기로 결정하면 개척 자금, 2년 간 사례비, 동역할 사람들을 지원해준다. 내가 다른 길을 가겠다고 결정내리기 어려웠던 이유다. 먹고 사는 게 걱정이었다. 누군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목회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목회 밖에 모르는 사람이 엄연한 현실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지원을 받으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목회하면 된다고 주변에서 설득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비난 섞인 말을 듣기도 했다. 틀린 말 하나 없었다. 괴로웠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목사님을 찾아가 나를 아예 개척 시나리오에서 제외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나의 어리석은 결정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님은 넉넉한 사랑을 베푸셨다. 교회를 개척하지 않아도 되니 원하는 사역을 그려보라 말씀해주셨다. 개척 지원을 하지 않는 대신 사례비를 장기적으로 지원해주는 방안을 고민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먹고 사는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사역을 마음껏 펼쳐보라는 뜻이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목격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은 아니었다. 또 다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무 지원도 받지 않고 빈 몸으로 나가기로 결정을 내렸고, 담임 목사님을 오랜 시간 설득했다. 결국 목사님은 내 결정에 따라주셨다. 연말까지 사역하고 사임하기로 했다.

이 과정을 다른 사역자들이 목격했다. 가족, 형제처럼 지내던 사역자들이었다. 그 중 N목사님이 담임목사님을 찾아갔다. N목사님은 이미 다른 사역자들과 논의를 해서 내가 하던 사역을 골고루 나눠 가졌다. 교회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하니 준비할 시간이라도 지원해주면 어떻겠냐고 사역자들에게 제안했고, 사역자들은 그의 의견에 따라주었다.

담임 목사님은 N목사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셨고, 나는 연말이 아닌 7월 초부터 내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시간을 벌어준다는 것은 연말까지 사례비를 지원받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6개월 동안 준비할 시간과 재정적인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만큼은 거절할 수 없었다. 눈물 나도록 감사한 일이었다.

부족한 내게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담임 목사님, 사역자,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폭풍 같은 시간이 흐르고 7월 1일, 나는 덩그러니 교회 밖에 혼자 존재했다.

교회 밖은 조용했다. 아무도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현실로 느껴지니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기도해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책 한 권 편하게 읽을 수 없었다. 사역을 내려놓은 지 불과 열흘이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 새벽에 나는 눈을 떴다. 거실로 나와 기도했다. 울음이 터졌다. 손으로 입을 막아도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내, 아이들이 듣고 깰까 걱정이 되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었다.

‘왜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결정일까 아니면 내 고집으로 내린 결정일까? 이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나는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손이 불쑥 나와 나를 집어 삼킬 것 같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책상에 앉아 성경을 읽었다. 불현듯,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있었다. 예기치 않게 벌어진 일이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를 도와줄 사람들을 보내줄 것이다.’

성경에 엎어져 울었다. 그 말이 사실이기 바랐다. 내 생각 어딘가에 떠돌아다니는 자기 암시가 아니기를, 하나님의 말씀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나님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혼자였다. 아무도 날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방법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거실 가장자리에 앉아 글을 써내려 갔다. 어설프게 ‘김유비닷컴’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새벽녘 어둠 속에서 쓴 글을 조심스럽게 블로그에 올렸다. 글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용기를 냈다. 어디선가 자신의 상처로 아파하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의 손에 내가 쓴 글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한 달이 지나고, 갓피플에서 연락이 왔다. 김유비닷컴에 올라와 있는 글 중 일부를 갓피플에 올리고 싶다고. 내게 감사하는 말을 했다. 감사한 사람은 나였다.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준 것도 감사한데, 내 글을 갓피플에 올려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규장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나는 갓피플에서 걸려온 전화라고 생각했다. 직급이 조금 더 높은 사람이 직원을 대신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대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을 멈추고 되물었다.

“잠시만요… 제가 책을 낼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수화기 너머로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요, 목사님. 규장에서 책을 내자고 하지, 음반을 내자고 하겠어요?”

나는 목이 메여 말을 할 수 없었다. 처음 통화하는 사람에게 울음소리를 들려줄 수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수는 없었다.

“너무 떨려 마음이 진정되지 않네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나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처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울음을 터뜨린 목사를 따듯한 목소리로 달래준 사람은 규장출판사 김아진 실장님이다. 책을 쓰는 내내 기도해주시고 격려해준 내 삶의 은인이다. 내 글이 그녀의 손에 닿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형편없는 글 쪼가리가 책이 되어 나올지도 전혀 예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울다가 웃다가 반쯤 정신 나간 상태로 하염없이 걸었다. 나를 마주친 사람들은 아마 내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는 생각했다.

‘책이 출판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이 어딘가 한 명 쯤은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했다.

규장출판사 여진구 대표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 떨렸다. 내게는 보여줄 것도 내세울 것도 없었다. 작고 초라할 뿐이었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 것 자체가 내겐 미안한 일이었다. 용기를 내어 마주한 그 자리에서 여 대표님이 말했다.

“목사님을 위해 기도했어요.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왜 연결해 주셨을까? 기도 중에 ‘나를 너무 사랑하는 목사다. 내가 그를 돕는 자로 널 보냈다’라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사님 곁으로 보내셨습니다. 책이 단 한 권만 팔리더라도 출판할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일하는 방식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목사님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할 거예요.”

나는 초면에 예의도 모르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달 전 어느 날 새벽, 어둠 속에서 성경에 엎드려 울던 그날이 기억났다. 하나님은 그날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날 위로해주신 것이다. 그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를 도와줄 사람들을 보내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았다. 그날 이후,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규장․갓피플 식구들과 교제하며 산다. 교회가 없으니, 잠시라도 따뜻한 공동체에서 사랑 받으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냉정하게 나를 살폈다. 나는 아무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나는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아니다. 일생을 선교지에서 보낸 선교사도, 박사 학위를 가진 전문가도 아니다. 영향력도 없고, 나를 아는 사람도 없다. 자격 없는 사람이 책 한 권 출간하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묻는다면 답변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선가 자신의 상처로 아파하며 울고 있는 한 사람에게 내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내가 찾는 그 사람이라면, 나는 행복하다.

미루고 미뤘던 말

“권사님이 위독하셔. 더 늦기 전에 한 번 찾아뵙는 게 어떨까?”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어머니가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곧바로 날짜를 잡았고,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미 오래전에 권사님을 찾아뵀어야 했다. 어쩌면 너무 늦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나 자신이 변변치 않아서였다.

 만약 내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면, 기꺼이 권사님을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부끄럽고 민망해서 그분 앞에 설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을 미루다, 나는 30대 초반이 되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권사님은 늙어갔고 이내 투병을 시작했다.

권사님이 갑자기 쓰려져,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어머니를 통해 내게 전해진 것이다.  

내 쪽에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권사님은 그렇지 않았다. 하루하루 호흡하며 살아가는 날들이 힘겨웠을 것이다.

시간을 더 끌다가는,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작고 초라한 나 자신이지만, 설익은 대로 보여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아내와 상의했고,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와 함께 권사님을 찾아갔다.

어머니가 아파트 현관에서 권사님 댁의 벨을 눌렀다.

딩동.

30년 전 어느 날에도, 어머니는 오늘처럼 벨을 눌렀다.

 

#

딩동.

“누구시죠?” 스피커 너머에서, 중년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이름은 정백림이었다.

“아. 그러니까. 저….” 젊은 여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시라고요?” 정백림은 답답한 듯 다시 물었다.

“아, 그러니까. 신문 수금을 하러 왔어요. 오늘 구독료 주시는 날이거든요.”

그녀는 어렵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정백림의 답변을 기다렸다.

고막을 긁는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툭하고 열렸다.  

“네, 들어오세요. 계단 조심하시고요.”

정백림의 목소리는 은은하게 따뜻했다.  

여자는 계단을 오르며, 눈앞에 조금씩 펼쳐지는 광경에 놀랐다.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정백림은 구독료를 손에 쥐고, 밝은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녀가 가까워지자, 정백림의 얼굴에서 순식 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자기 인생의 절반의 살아버린 시점에서 판단하건데, 여자의 행색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여자의 얼굴은 광대뼈가 나올 만큼 퀭했다. 품에 안고 있는 아기는 핏덩어리라고 부르는 것이 나았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아이를 품에 안고, 남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정백림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건넸다.

“새댁, 내가 보니까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잠시만 우리 집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면 안 될까?”

잔뜩 위축되어 있었던 그녀는 경계심을 풀고,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정백림은 여자의 손을 잡고, 집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집 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찻잔에서 김이 모라모락 피어났다. 정백림은 그녀 앞으로 찻잔을 밀어주었다. 긴장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정백림은 찻잔에 윗 입술을 살짝 담그더니,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한 차의 여운이 입술에 머물렀다. 따뜻한 기운을 실어나르듯, 정백림이 그녀에게 물었다.

“새댁, 사연이 뭔지 들어볼 수 있을까?”

여자는 눈치도 없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정백림은 그녀 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정백림은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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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몇 시예요?”

도시를 계발한다고, 공사가 한창이었다. 허벌판에 버스정거장 하나뿐이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십 대 여자가 초조한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자, 약속 시간에 늦을까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다. 

버스정거장에 함께 서 있던 남자가 껌을 씹으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신문을 든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었다. 비스듬히 서서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는 두 어번 시도한 끝에 어렵게 입술을 떼서, 남자에게 “몇 시냐고” 물었다.

여자의 질문을 받자,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신문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팔을 쭉 내밀어서, 팔목을 덮은 옷이 짧아지게 했다. 그녀가 코앞에서 시계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손목을 내밀어 줬다. 남자의 장난이었다.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남자도 따라 피식 웃었다. 그리고, 둘은 아무 말 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타서 무의식적으로 빈자리를 찾았다. 하필이면, 맨 뒷자리에 두 자리가 비었다. 창가 쪽에 여자가 앉고, 그 바로 옆에 남자가 앉았다. 여자는 창밖을 바라봤다. 버스 안은 시끌벅적 했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뒷좌석 아래로 자동차 엔진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침묵을 깨고,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남자 쪽을 쳐다봤다. 남자의 손에는 껌이 하나 들려져 있었다. 여자는 피식 웃으면서 껌을 받아 들었다.

그 후로 남자는, 자녀들 앞에서 “껌으로 엄마를 꼬셨다”고 주장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애들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네”라고 말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했고, 순진했던 시골 여자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숨겨왔던 진실을 말한 것이다.

남자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지만, 결혼할 수 없었다.

여자의 생각은 달랐다.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여자의 고집으로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녀는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시골에서 조용히 사춘기를 보내면서, 낭만적인 연애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이 화근이었다고 오랜 시간 주장했다.

아기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남자는 여자 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려졌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남자는 죽을 날을 기다리며 병상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살리고 싶었다. 약 한 봉지라도 더 먹이고 싶었고, 주사 한 대라도 더 맞추고 싶었다.

한가하게 누워서 산후조리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전화번호부를 넘겨가며 일자리를 찾았다.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허드렛일뿐이었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기술이 없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신문 수금이었다.

지금이야, 자동이체나 지로 용지로 구독료를 지불하지만, 당시에는 사람이 직접 방문해서 수금을 하던 시절이었다.   

여자가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골목골목을 누비는 사이, 남자는 아내와 아기를 길바닥에 버려둔 채 침상에서 사경을 헤맸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의 손바닥으로 만들어진 그늘에서 새근새근 낮잠을 잤다.

출산 직후부터 몸을 고되게 쓰니, 여자의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발바닥부터 관자놀이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구석진 골목에서 아기 젖을 먹이다, 여자가 구슬프게 울었다. 멀리서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쓰레기통에서 생선을 찾는 고양이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하염없이 울다가, 핏덩어리의 얼굴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섰다. 걷고 또 걸어서, 집집을 방문했다.

비틀거리며 골목을 걷는 여자는 남편을 따라 죽지도 못하고, 남편 없이 살지도 못하는 서글픈 운명에 처한 것이다. 품에 안긴 핏덩어리를 꼬옥 끌어안는 것이, 그녀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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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백림은 마음이 아파 어찌할지 몰랐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잠깐만 나랑 밖에 나가요.”

여자가 대답할 겨를 도 없이, 정백림은 여자의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다.

정백림은 여자를 데리고, 은행과 시장을 차례로 방문했다. 단골 정육점에 가서 소고기와 사골 뼈를 샀다. 그녀에게 주소를 묻고, 주소가 쓰인 메모지를 정육점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웃돈을 얹어주면서, 배달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시장 밖으로 나온 정백림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새댁, 절대로 포기하지 마. 힘을 합쳐서, 남편 한 번 살려보자. 일단, 남편 고깃국부터 해 먹이고, 이 돈으로 약 값해서 남편 기운부터 차리게 해. 남편 안 죽을 거야. 이 자그마한 핏덩어리를 남겨두고 남편이 어떻게 죽어.”

여자는 골목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자의 눈물이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여자의 눈물이 핏물이라도 되는 듯이, 잠에서 깬 아기는 거칠게도 울었다.

여자는 골목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자의 눈물이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여자의 눈물이 핏물이라도 되는 듯이, 잠에서 깬 아기는 거칠게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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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학교를 간다고 하자, 어머니가 기뻐했다. 거실 귀퉁이에 앉아 과일을 깎아 접시에 담으면서, 혼자말처럼 권사님에 대해 말했다.

“그분이 나를 교회로 이끌어주신 분이야. 그분 덕분에 엄마가 예수 믿고, 아빠가 예수 믿고, 너희가 예수 믿은 거야.

그분 남편이 김명호 박사님이신데,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셨어. 연세대 원주 캠퍼스 초대학장도 하시고, 남부러울 것이 없는 분이셨거든. 그렇게 부족한 거 하나 없으신 분들이, 엄마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주셨다는 게 놀랍지 않니? ”

어머니가 사과를 깎아서 접시에 담았다. 씨앗 부분을 손에 들고, 칼로 발라내지 못한 귀퉁이를 한 입 깨물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찾아봬야 해.”   

“네, 알겠어요.”

어머니는 내심 불안했는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권사님이 보고 싶대.”

“그러니까, 알겠다고요.”

나는 대화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다. 어머니야, 서로 편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무슨 명분으로 어떻게 찾아뵙는다는 말인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어머니의 구구절절 이어지는 설명에 나는 더욱 주눅이 들었다. 감히 나 같은 사람이 찾아뵐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결심을 했다.

‘나도 뭔가 보여줄 게 있어야지.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춘 다음에 찾아가자.’

상처와 욕망이 교묘히 섞여서, 바보 같은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였다. 그만큼 철이 없었다. 젊음을 담보로, 터무니없이 교만했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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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명절만 되면, “언제 갈까?”라고 물었다.

마음이 답답했던 나는, 어머니가 민망할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가고 싶을 때 갈게요. 어떻게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세요. 이제 그만하세요.”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지만, 어머니가 “언제 갈래?”라는 말을 꺼 때마다,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그분들의 화려한 경력 아래, 한 줄 더 추가해도 괜찮을 듯한 그런 만남이 되기를 나는 바랐다. 내 몸값을 최대한 끌어올려서 그분들을 만난다면, 나도 빛나고 그들도 빛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보란 듯이 성공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때, 품 안에 있던 핏덩어리가 접니다.”

참으로 어리석었지만, 이것이 내 계획이었다.

그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을 때까지, 만남은 무기한 보류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보잘 것 없는 내 인생을 들여다보고, 나는 아직도 멀고 멀었다는 생각에 위축되었다.

당시 나는 개척교회 전도사였고, 고등학생 한 명을 전도하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주일마다 텅 빈 예배당을 혼자 지켜내며 패배감에 몸부림쳤다.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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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사역을 8년쯤 했을 때, 아내와 나는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교회에서 맡았던 사역을 내려놓고, 살던 집과 살림을 정리했다. 출국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이래저래 바쁘게 지냈다.

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권사님이 며칠 전에, 쓰러지셨다가 큰 고비를 넘기셨어. 너 공부하러 나가면, 돌아올 때까지 권사님 못 버티실 거야. 더 늦기 전에 꼭 만나야 해.”

더 이상 만남을 미룰 명분이 없었다. 어쩌면, 권사님의 시간이 모자라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내 쪽에서 현실을 직시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내 인생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목회를 하면서, 이미 나는 크고 작은 실패를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야심으로 당차게 시작한, 내 꿈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유학을 떠나는 줄 알았겠지만, 솔직히 나는 도피성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목회자들의 리그에 나는 알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유니폼을 입는 것 자체가 어색했는데, 그동안 참고 버틴 것이다. 리그를 떠나고 싶었다.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가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잠시 얼굴만 보여주고, 그 부끄러움은 한국에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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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누구세요?”

스피커 너머로 권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예요, 권사님.”

소음 없이 스르르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권사님이 살아계실 때 볼 수 있어서.”

나는 말했다.

“그러게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 가족을 맞이했다. 김명호 박사님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거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있는 권사님이 보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기운이 없어 보였다. 질병이 내던진 돌무더기를 온몸으로 맞은 듯했다.

나는 가만히 권사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권사님,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하는데, 눈물이 울컥 터졌다. 권사님이 힘겹게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주었다. 30년 전, 내 어머니를 잡았던 그 손이었다.

권사님이 말했다.

“고마워. 이렇게 찾아와줘서.”

나는 말했다.

“권사님 덕분에,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권사님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는 차오르는 감격을 애써 진정시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권사님은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고맙지. 그때, 내가 예수님을 정말 사랑했어.”

기운이 없는 권사님은 잠시의 여운을 두고, 호흡을 다듬으셨다.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런 거지, 다른 이유는 없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울었다.

이를 눈치챘는지, 김명호 박사님이 나를 툭툭 치더니, 과일 하나를 포크로 찍어서 내게 전해주었다. 내가 과일을 전해 받자, 김명호 박사님은 어서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손자를 대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이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김명호 박사님이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흑백 사진 안에는, 여덟 명의 젊은이들이 담겨 있었다. 십자가가 새겨진 천막 앞에서,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자신이 몸담은 교회가 개척될 당시의 사진이라고 하셨다. 교회 개척부터 지금까지 한 교회를 우직하게 섬겨온 것이다.

김명호 박사님은 수화를 하듯이, 검지손가락으로 사진 속 젊은 남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가슴팍에 대고 자신이라고 가리켰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박사님은 다시 검지손가락으로 젊은 여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가락 그대로 권사님을 가리켰다. 권사님이 거칠게 기침을 했다. 큰 웃음을 감당할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가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김명호 박사님은 서랍에서 낡은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 준비한 것이다. 박사님은 그 사진 한 장을 품에 끌어안고 아이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어머니가 끼어들며 말했다.

“저 방에 한 번 들어가 봐. 깜짝 놀랄 거야.”

나는 당황해서, ‘어떻게 남의 방을 막 들어가요?’라는 눈빛으로 어머니를 쳐다봤다.

어머니가 내 허벅지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괜찮아. 들어가 봐. 박사님도 좋아하실걸?”

대화를 지켜보던, 박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일어서자, 내 아내와 아이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따라 일어섰다.

박사님이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마음껏 보라는 듯, 한 걸음 물러서셨다.

어머니 말대로, 나는 깜짝 놀랐다.

셀 수 없이 많은 트로피와 감사패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트로피와 감사패가 진열장이 아닌 방바닥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도 많아서 두세 줄로 겹쳐서 세워져 있었다. 애지중지 아끼는 소장품이 아니라, 처리하기 힘든 골치 아픈 물건들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마음속에서 소리 없이 지진이 일어났다. 나는 지독하게 어리석어서, 내 마음속 텅 빈 진열장을 트로피로 꽉꽉 채워서 이곳에 오고 싶었던 것이었다.

두 분에게 트로피는 쓰레기였다. 굳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흑백 사진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나는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텅 빈 진열장을 꾸미고 닦고 칠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바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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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오는 길에 소파에 기대어 앉아계시는 권사님의 손을 한 번 더 꼭 잡았다.

박사님은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 밖까지 나와 작별 인사를 건넸다. 따뜻하고 겸손하게 우리를 배웅해주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 놀이터를 발견한 아이들은 고민하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아이들을 따라갔다. 아내와 나는 천천히 걸었다.

내가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의 노년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도 그렇다는 듯, 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우리는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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