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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지우고, 진실은 남긴다 

희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앞에 앉았다.

 

아파트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녀는 손에 쥔 야구방망이를 단단히 잡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문을 열면, 사정없이 내려칠 작정이었다.

 

그녀가 열여덟 살 때였다.

 

“희수야. 너 잠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인기척을 느낀 엄마가 현관 앞에 우두커니 앉은 희수에게 물었다.

 

희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을 안 자고 뭐 하냐고 희수야?”

 

희수는 현관문을 똑바로 응시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둑 지키잖아.”

 

엄마는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희수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가서 자.”

 

“엄마는 상관하지 마.”

 

다음 날, 희수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정신과 의사는 희수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스트레스가 많아요.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희수의 엄마는 불안했지만, 의사의 말을 신뢰하고 싶었다.

 

정신과에 다녀온 이후에도, 희수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밤에 일어나, 도둑을 지켰다.

 

그녀의 엄마는 시간이 빨리 흘러, 희수가 이상한 증상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

 

“왜 한 달에 한 벌꼴인지 아세요? 제가 생리하는 주기마다 도둑을 지킨 거예요. 엄마는 같은 여자면서, 그것도 모른 거죠. 얼마나 무심한 여자인지 아시겠죠? 저한테 관심이 없으셨어요.”

 

#

 

비가 주섬주섬 내리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희수야. 그만 좀 자고 일어나. 너는 주말마다 그렇게 늦잠을 자니? 엄마, 지금 오빠랑 백화점에 다녀올 테니까, 일어나면 아침밥 챙겨 먹어.”

 

희수는 샛눈을 뜨고, 시계를 확인했다. 엄마를 힐끔 보고는, 짜증 난다는 듯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돌아누웠다.

 

“고등학생이 잠을 저렇게 자.”

 

현관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말이다.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어.”

 

엄마가 장단을 맞췄다.

 

“한심하다, 한심해.”

 

오빠가 남긴 마지막 말에, 희수는 정신이 또렷해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머그컵에 우유를 따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코코아 분말 가루를 세 숟가락 넣었다. 차 스푼으로 코코아를 저으며, 창가에 섰다. 주섬주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머그컵 안의 코코아가 입술에 닿았을 때, 쇠로 된 현관문이 쿵쿵 울렸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에 들고 있던 코코아를 놓쳤다. 머그컵은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코코아는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저 택배인데요, 반품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안에 계시나요?”

 

그녀는 숨을 죽였다.

 

인터폰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카메라에 비친, 남성은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도리에서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코코아 위에 주저앉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때아닌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뭐야, 이거? 집이 왜 이렇게 난장판이야?”

 

오빠가 말했다.

 

“희수야! 이게 뭐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말했다.

 

사방으로 튀겨서 굳어버린 코코아 자국은 차갑게 식어버린 핏자국처럼 참혹했다. 마치 살인사건의 현장을 방불케 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

 

희수의 엄마는 물걸레로 사방에 새겨진 코코아 자국을 닦아내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침대에 누워 울고 있는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였다.

 

자정이 넘은 시각, 그녀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앞 베란다 창고에서, 오빠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야구방망이를 꺼냈다. 정자세로 현관 앞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

 

“꿈을 꿔요. 지금까지 여러 명의 상담자를 만나봤지만, 내가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정확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요?”

 

그녀는 꿈에 대해 말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와요. 검은 모자에 검은 마스크, 나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어요. 그 남자는 내 존재를 알지 못해요.

 

나는 이 모든 것을 내 옷장에서 지켜보고 있어요. 그 남자는 옷장으로 다가와, 옷장 아래 서랍을 열죠. 나는 살짝 열린 옷장 틈으로, 그 남자를 마주 봐요.

 

그 남자는 서랍을 열고, 내 양말을 훔쳐서 달아나요. 그 남자가 떠나고 나면, 나는 내 양말을 돌려달라며 엉엉 울죠.

 

이 꿈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녀와 나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녀는 차분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명백한 시험이었다.

 

내가 안전하고 믿을만한 사람인지 그녀의 방식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녀는 상담실에 남을 수도, 상담실을 떠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명의 상담자를 만나봤고, 그동안의 상담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새로운 상담자를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그녀는 왜 다른 내담자들처럼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가? 알 수 없었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첫째, 그녀가 그렇게 질문한 의도를 묻는다. 의도를 묻는 과정에서, 그녀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고, 왜 그런 꿈을 꾸는지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에 꼿꼿하게 서 있는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순순히 말해줄 의도가 없어 보였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녀의 눈빛은 내게 답을 맞힐 수 있겠냐고 묻는듯했다.

 

둘째, 그녀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를 건강하게 설정하기 위해, 잠시 동안 교육적인 대화를 나눈다.

 

상담자는 초능력자나 점쟁이가 아니다. 내담자가 모르는 것을 상담자가 알 수는 없다.

 

내담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서, 보다 명확하게 내담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상담자의 역할이다.

 

내담자가 상담자의 능력을 테스트한다거나, 상담자와 힘겨루기를 한다면 상담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교육적인 대화를 통해, 내담자가 상담자를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그녀는 예의 바르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날 것이다.

 

셋째,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상담자 스스로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 상담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상담자가 솔직하게 자신을 개방했기 때문에, 내담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단, 기술이 아닌 진심을 담아야 한다. 진심이 없으면, 상담자는 실제로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진심을 담으면 무능함도 실력이 될 수 있다.

 

내가 “모르겠다.”라고 솔직히 말한다면, 마주한 그녀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담은 즉시 종결될 것이었다.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상담실을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이다. 그녀가 묻는 말에, 군더더기 없이 대답하는 것이다.

 

틀린다면?

 

어차피 그녀는 떠날 것이다.

 

맞춘다면?

 

몇 세션을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실제적인 유익이 있을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담은 일대일로 비밀리에 진행된다. 그녀가 나를 유능한 상담자로 인정해준다고 해도 다른 내담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녀와의 상담을 지속하고 싶은가?

 

자존심 때문일까? ‘너도 다른 상담자들과 다를 바 없구나’라는 식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이 불편한 것일까?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단지 그런 이유에서 상담을 지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나는 왜 그녀와의 상담을 지속하고 싶은 것일까?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그녀는 이제껏 자신을 안전하게 개방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퀴즈를 멈추지 않는 이상, 상담실을 전전하는 기약 없는 여정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멈춰야 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해야 했다. 그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었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유능한 상담자들을 십수 년 간 만나온 터였고, 기적은 없었다. 무능한 내가 그녀를 마주한 이유였다. 유능한 상담자들을 거치고 거쳐, 나에게 흘러든 것이다. 

 

제아무리 유능한 상담자라도, 스스로 상담실을 떠나려는 내담자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상담자는 상담실 밖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녀를 멈추고 싶었다.

 

나는 무모해지기로 했다.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당신은 어릴 때, 성적인 공격을 받았을 거예요. 옷장에 숨을 수 있는 나이였다면, 아주 어린아이였겠죠.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아는 사람은 아닐 겁니다. 익명의 사람일 거예요.

 

당신이 고등학교 때 겪은 일은, 최초의 사건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그것이 최초의 사건인 것처럼 말했어요. 의도적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나에게 제시한 유일한 단서이자 힌트였을 겁니다. 내가 문제를 맞추기를 바란 것이죠.

 

고등학교 때, 당신이 인터폰 앞에서 마주한 남자가 쇠사슬을 끊은 거예요. 그 바람에, 지하 감옥에 가둬놓은 괴물이 탈출한 것이죠.

 

당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상처를 그 사건이 끄집어 낸 겁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 끔찍한 일을 겪은 그날에도, 비가 내렸을 가능성이 높아요.

 

평소에 나는 절대로 내담자가 말하지 않는 내용을 앞서서 추측하지 않습니다. 내담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나는 지금 무모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신이 원했기 때문에, 내 멋대로 당신을 추측해버린 겁니다.

 

이제 나는 취약해졌어요. 거절과 수용의 극단적 상황에 나 스스로를 몰아넣은 겁니다.

 

자,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건 가요? 아니면, 평소처럼 예의 바르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상담실을 떠나버리실 건가요?”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침묵한 몇 초의 시간 동안, 나는 늙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앉고,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섯 살 때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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