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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지우고, 진실은 남긴다 

“권사님이 위독하셔. 더 늦기 전에 한 번 찾아뵙는 게 어떨까?”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어머니가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곧바로 날짜를 잡았고,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미 오래전에 권사님을 찾아뵀어야 했다. 어쩌면 너무 늦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나 자신이 변변치 않아서였다.

 

만약 내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었다면, 기꺼이 권사님을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부끄럽고 민망해서 그분 앞에 설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을 미루다, 나는 30대 초반이 되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권사님은 늙어갔고 이내 투병을 시작했다.

 

권사님이 갑자기 쓰려져,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어머니를 통해 내게 전해진 것이다.  

 

내 쪽에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권사님은 그렇지 않았다. 하루하루 호흡하며 살아가는 날들이 힘겨웠을 것이다.

 

시간을 더 끌다가는,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작고 초라한 나 자신이지만, 설익은 대로 보여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아내와 상의했고,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와 함께 권사님을 찾아갔다.

 

어머니가 아파트 현관에서 권사님 댁의 벨을 눌렀다.

 

딩동.

 

30년 전 어느 날에도, 어머니는 오늘처럼 벨을 눌렀다.

 

#

 

딩동.

 

“누구시죠?” 스피커 너머에서, 중년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이름은 정백림이었다.

 

“아. 그러니까. 저….” 젊은 여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시라고요?” 정백림은 답답한 듯 다시 물었다.

 

“아, 그러니까. 신문 수금을 하러 왔어요. 오늘 구독료 주시는 날이거든요.”

 

그녀는 어렵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정백림의 답변을 기다렸다.

 

고막을 긁는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툭하고 열렸다.  

 

“네, 들어오세요. 계단 조심하시고요.”

 

정백림의 목소리는 은은하게 따뜻했다.  

 

여자는 계단을 오르며, 눈앞에 조금씩 펼쳐지는 광경에 놀랐다.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정백림은 구독료를 손에 쥐고, 밝은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녀가 가까워지자, 정백림의 얼굴에서 순식 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자기 인생의 절반의 살아버린 시점에서 판단하건데, 여자의 행색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여자의 얼굴은 광대뼈가 나올 만큼 퀭했다. 품에 안고 있는 아기는 핏덩어리라고 부르는 것이 나았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아이를 품에 안고, 남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정백림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건넸다.

 

“새댁, 내가 보니까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잠시만 우리 집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면 안 될까?”

 

잔뜩 위축되어 있었던 그녀는 경계심을 풀고,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정백림은 여자의 손을 잡고, 집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집 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찻잔에서 김이 모라모락 피어났다. 정백림은 그녀 앞으로 찻잔을 밀어주었다. 긴장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정백림은 찻잔에 윗 입술을 살짝 담그더니,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한 차의 여운이 입술에 머물렀다. 따뜻한 기운을 실어나르듯, 정백림이 그녀에게 물었다.

 

“새댁, 사연이 뭔지 들어볼 수 있을까?”

 

여자는 눈치도 없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정백림은 그녀 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정백림은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

 

“지금 몇 시예요?”

 

도시를 계발한다고, 공사가 한창이었다. 허벌판에 버스정거장 하나뿐이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십 대 여자가 초조한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자, 약속 시간에 늦을까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다.  

 

버스정거장에 함께 서 있던 남자가 껌을 씹으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신문을 든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었다. 비스듬히 서서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는 두 어번 시도한 끝에 어렵게 입술을 떼서, 남자에게 “몇 시냐고” 물었다.

 

여자의 질문을 받자,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신문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팔을 쭉 내밀어서, 팔목을 덮은 옷이 짧아지게 했다. 그녀가 코앞에서 시계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손목을 내밀어 줬다. 남자의 장난이었다.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남자도 따라 피식 웃었다. 그리고, 둘은 아무 말 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타서 무의식적으로 빈자리를 찾았다. 하필이면, 맨 뒷자리에 두 자리가 비었다. 창가 쪽에 여자가 앉고, 그 바로 옆에 남자가 앉았다. 여자는 창밖을 바라봤다. 버스 안은 시끌벅적 했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뒷좌석 아래로 자동차 엔진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침묵을 깨고,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남자 쪽을 쳐다봤다. 남자의 손에는 껌이 하나 들려져 있었다. 여자는 피식 웃으면서 껌을 받아 들었다.

 

그 후로 남자는, 자녀들 앞에서 “껌으로 엄마를 꼬셨다”고 주장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애들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네”라고 말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했고, 순진했던 시골 여자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남자는 여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숨겨왔던 진실을 말한 것이다.

 

남자는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지만, 결혼할 수 없었다.

 

여자의 생각은 달랐다.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여자의 고집으로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녀는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시골에서 조용히 사춘기를 보내면서, 낭만적인 연애 소설을 많이 읽은 것이 화근이었다고 오랜 시간 주장했다.

 

아기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남자는 여자 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려졌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남자는 죽을 날을 기다리며 병상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남자를 살리고 싶었다. 약 한 봉지라도 더 먹이고 싶었고, 주사 한 대라도 더 맞추고 싶었다.

 

한가하게 누워서 산후조리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전화번호부를 넘겨가며 일자리를 찾았다.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허드렛일뿐이었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기술이 없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신문 수금이었다.

 

지금이야, 자동이체나 지로 용지로 구독료를 지불하지만, 당시에는 사람이 직접 방문해서 수금을 하던 시절이었다.   

 

여자가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골목골목을 누비는 사이, 남자는 아내와 아기를 길바닥에 버려둔 채 침상에서 사경을 헤맸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의 손바닥으로 만들어진 그늘에서 새근새근 낮잠을 잤다.

 

출산 직후부터 몸을 고되게 쓰니, 여자의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발바닥부터 관자놀이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구석진 골목에서 아기 젖을 먹이다, 여자가 구슬프게 울었다. 멀리서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쓰레기통에서 생선을 찾는 고양이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하염없이 울다가, 핏덩어리의 얼굴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섰다. 걷고 또 걸어서, 집집을 방문했다.

 

비틀거리며 골목을 걷는 여자는 남편을 따라 죽지도 못하고, 남편 없이 살지도 못하는 서글픈 운명에 처한 것이다. 품에 안긴 핏덩어리를 꼬옥 끌어안는 것이, 그녀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백림은 마음이 아파 어찌할지 몰랐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잠깐만 나랑 밖에 나가요.”

 

여자가 대답할 겨를 도 없이, 정백림은 여자의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다.

 

정백림은 여자를 데리고, 은행과 시장을 차례로 방문했다. 단골 정육점에 가서 소고기와 사골 뼈를 샀다. 그녀에게 주소를 묻고, 주소가 쓰인 메모지를 정육점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웃돈을 얹어주면서, 배달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시장 밖으로 나온 정백림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새댁, 절대로 포기하지 마. 힘을 합쳐서, 남편 한 번 살려보자. 일단, 남편 고깃국부터 해 먹이고, 이 돈으로 약 값해서 남편 기운부터 차리게 해. 남편 안 죽을 거야. 이 자그마한 핏덩어리를 남겨두고 남편이 어떻게 죽어.”

 

여자는 골목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자의 눈물이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여자의 눈물이 핏물이라도 되는 듯이, 잠에서 깬 아기는 거칠게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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