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엄마가 잠시 보러 가도 될까?”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주일 저녁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전화를 걸었고, 나를 보러 오려면 대중교통으로 세 네 시간 걸려 번거로운 발걸음을 해야 했다.

내 쪽에서도 갈 수 없었다. 당시 나는 20대 초반이었고, 운전면허조차 없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는 이미 집을 나선 것 같았고, 어머니는 내가 아니더라도 어딘가 가야 할 곳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나는 알겠다고 짧게 답했다.

어머니와 4호선 어느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겨울이었다. 바람은 매섭고 날은 추웠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나는 추위에 떨었다. 역 안에서도 추위를 피할 수 없었다. 두 개의 출구에서 불어닥치는 맞바람이 짜증스러웠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를 마주한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추운 겨울에, 어머니는 반팔 티셔츠에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급하게 잠바를 벗어주며, 어머니께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됐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를 데리고, 추위를 녹일 장소를 장소를 찾았지만, 나는 돈이 없었다. 주머니에 천 원짜리 지폐 두 장과 동전 몇 개뿐이었다.

어머니에게 묻지 않았지만, 어머니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집에서 급하게 나온 게 분명해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답답할 뿐이었다.

“우리 잠깐 저기서 이야기 좀 할까?”

어머니가 가리킨 곳은 지하철 역사 안에 작게 자리 잡은 제과점이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메뉴판을 살폈다. 가장 저렴한 메뉴는 우유였다. 나는 우유를 주문했다.

나는 점원에게 우유를 데워달라고 부탁했다. 추위로 얼어붙은 어머니의 몸을 조금이라도 녹여볼 생각이었다. 점원은 친절했다. 유리컵에 우유를 따라 내주었다.

우유 한 잔을 앞에 놓고, 어머니와 나는 마주 앉았다.

어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은 시골 마을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하루 여섯 번 버스가 드나들고, 동네에 구멍가게 하나 없는 시골 마을이었다.

100가구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고, 모두가 왕 씨였다. 왕 씨 마을에 이방인이 나타나 새로운 둥지를 튼 것이 동네 화제거리였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 중에는 6.25 전쟁이 일어난 것조차 모르는 분들도 계셨다. 마을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 북한군도 마을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부모님은 목회 장소를 알아보러 전국 팔도를 다니셨다. 그러다, “오성리”를 발견했다. 오성리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단 하나다. 교회가 유일하게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흉가를 발견했고, 집주인을 수소문했다. 3년 전에, 서울로 상경한 어느 노부부의 집이었다. 주인은 흔쾌히 계약서를 써주었고, 부모님은 그곳에서 목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어려서 몰랐지만, 집주인이 계약서를 흔쾌히 써 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집주인이 버리고 간 집이 관리가 되지 않아, 엉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흉가라고 불렀다.

흙으로 지어진 집은 낡아서 쓰려지기 직전이었다. 벽에는 구멍이 군데군데 뚫려있었고, 창호지를 붙여 만든 문짝과 창문은 낡아서 떨어져 문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마당의 갈대가 아버지 키만큼 자라서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낫으로 갈대를 베면서, 임시로 길을 만들었다. 마당의 풀을 베고, 흙으로 벽의 구명을 막고, 창호지를 다시 발라 문과 창문을 달아끼웠다.

처음 겨울이 죽을 맛이었다. 낡은 시골집에 보일러가 있을 리 없었다. 아궁이에 불을 피워 난방을 했다. 여기저기 금이 간 바닥 틈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연기 때문에 난방을 할 수 없어 전기장판으로 첫해를 났다. 이듬 해 봄, 아버지는 손수 보일러를 깔았다.

마당 구석에 작은 창고가 있었다. 스티로폼을 깔고, 장판을 깔아 교회처럼 꾸몄다. 첫 예배를 드리는 날, 부모님이 많이 우셨다. 그렇게, 오성교회가 시작되었다.

십 년 동안 부모님이 많이 고생하셨다.

험악한 세월이 지나고, 남은 것은 빚더미였다. 은행에서 빌린 돈에 대한 독촉이 날로 심해졌다.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으셨던 부모님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오성리를 떠나야 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부모님이 다정하게 지내실 리 없었다. 서로 예민해져셔 사소한 일로 격하게 다투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성리를 허망하게 떠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찾아온 그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심하게 다투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홧김에 휘두른 손바닥은 어머니에게 사형선고였다.

젊은 날, 어머니는 술 취한 아버지의 손찌검을 견딜 수 없었다. 도망치고, 붙잡히는 삶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가정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남편이 언젠가는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 덕분에 아버지, 그리고 나와 내 여동생이 회심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술과 담배를 끊고 목회자가 되기까지 어머니는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다”라는 희망만을 가지고 살았다.

아버지가 홧김에 휘두른 손바닥은 어머니의 모든 희망을 잿더미로 바꾸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한 공간 안에 있을 수 없었다. 추운 겨울,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선 이유였다.

아버지가 휘두른 손바닥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심정 또한 내게 전해졌다. 아버지 역시 현실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나는 살아오면서 아버지가 마음 편히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성도 한 명 없는 목회를 하면서 하루하루 얼마나 힘들었을까. 쌀독에 쌀이 떨어지고, 먹을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이 그저 원망스러웠지만, 그 잘난 목회한다고 자식을 굶기는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셨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 가족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처절하게 실패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길을 잃었다.

아무리 20대라고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줄 능력도, 어머니에게 빵 하나 사줄 능력도 없었다. 오늘 하루 어머니를 재워줄 거처 조차 없었다.

내 처지도 딱했다. 내가 길바닥에서 먹고 잔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가 자기 부모님을 설득해, 나를 자기 집에서 살게 해줬다. 적어도 나는 오늘 하루 묵을 집이 있었던 것이다.

내 수중에는 돌아갈 차비가 전부였다. 내가 차비를 내밀자, 어머니는 손을 저었다. 나는 어쩔 생각이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머니는 차분하게 답했다.

“여기 가까운 곳에 교회가 많더라. 문이 열린 교회 가서 밤새 철야하고 기도하면 돼. 걱정하지 마.”

어머니는 여기서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나설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니 앞에서 울지 않았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지하철 출구 계단으로 나가서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서 쉽게 돌아설 수 없었다.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막차가 올 시간이 다가와서야 몸을 돌이켰다.

어머니를 길가에 내다 버린 기분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걸을 수조차 없었다. 지하철 막차는 나를 어머니에게서 더 멀찌감치 떼어놓았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눈물은 거세졌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목회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집안을 일으켜야 해. 일단, 군대부터 가자.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자.’

학사 장교를 준비하고 있던, 나는 현역으로 가장 빠르게 입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가장 빠르게 입대할 수 있는 군이 해병대였다. 나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해병대에 지원했다. 지원부터 입대까지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입대를 이틀 남겨두고 부모님께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2년 만 참고 견뎌주세요. 다시 돌아와서 힘껏 도울게요.”

부모님은 고개 숙여 울었다. 갑작스러운 입대로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도 이해해주실 것이라 믿었다. 

훈련생들은 밤낮으로 긴장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지막 주에 가장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극기주”라고 불리는 마지막 주 훈련은 인간의 한계 상황을 간접적으로 경험시켜주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나는 훈련이 힘들지 않았다. 남들보다 체력이 강해서가 아니다. 몸으로 하는 고된 훈련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 내 정신은 잠시나마 쉴 수 있었다. 나는 잠시라도 틈이 나면, 부모님 걱정에 괴로웠다. 차라리 몸이 힘든 게 훨씬 나았다.

저녁이 되면, 온통 부모님 생각이었다. 훈련소의 생활로 몸이 힘들어도 나는 부모님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누울 곳이 있고, 삼시 세끼 식사가 꼬박꼬박 나오는 것으로 감사했다.

부모님은 어찌 지내시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오성리를 떠나신지 열 흘이 지났다. 부모님은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오성리를 떠났을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빚이 전부였다. 부모님께 전화를 할 수 없으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 수 없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는데, 한 밤중에 사이렌이 울렸다. 급하게 전투복을 입고 연병장으로 뛰어나갔다.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어수선했다. 구르고 뛰고 정신없었다.

가만히 서 있을 수조차 없을 만큼 체력이 다했을 때, 교관이 훈련생을 일렬로 세웠다. 그리고, 통나무를 들어 올리라 했다. 

나무의 줄기 부분과 뿌리 부분만 잘라놓은 것처럼, 커다랗고 긴 통나무였다. 여섯 명이 일렬로 서서 힘을 합쳐 들어 올렸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거웠다.

통나무를 들어 올린 순간부터, 교관은 훈련생들을 노련하게 괴롭혔다. 구호에 맞춰 통나무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훈련생들이 하나 둘 탈진했다.

이제 죽겠다 싶을 때, 교관은 통나무를 머리 위로 끝까지 들어 올리고 그대로 멈추라고 했다. 땀이 비 오듯 했다. 통나무를 바닥에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교관은 잠시 침묵하다가, 메아리가 칠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힘들어? 이게 뭐가 힘들어. 너희들을 지금까지 키워주신 부모님의 무게에 비하면 깃털이야. 지금부터 있는 힘껏 하늘을 향해 ‘어머니’를 부른다, 알겠나. 실시!”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그 당시에는 정말 진지했다. 연병장의 모든 훈련생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통나무를 번쩍 들어 올렸다. 목청껏 “어머니”를 부르며 흐느껴 울었다. 포항 하늘에 사내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날 밤, 마음껏 어머니를 부르며, 소리 내어 울었다.

훈련소 주말 아침, 잠시 쉬는 시간에 각자의 할 일을 했다. 단 몇 시간 만큼은 자유였다. 대부분 자거나 수다를 떨었다. 

아무리 휴일이라도 군대는 군대였다. 저벅저벅 교관이 걸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자세를 갖춰 앉았다.   

교관은 편지지를 나눠주면서, 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편지지를 받아든 훈련생들은 저마다 자리에 앉아서 쥐 죽은 듯 편지를 써 내려갔다. 지난밤에 어머니를 부르며 흘렸던 눈물로 모자랐던지, 여기저기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소리 없이 우는 훈련생들이 보였다.

나도 편지지를 받아들고, 바닥에 엎드려 편지를 써내려갔다. 편지를 중간쯤 써 내려갔을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손으로 눈물을 잽싸게 닦아냈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목청껏 어머니를 부르며 울 때는 엄연히 밤이었다. 모두가 함께 울면, 아무도 울지 않은 것이 된다. 아무도 내가 운 것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조차도.

옆자리를 쓰던 훈련생이 내가 억지로 울음을 참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 녀석은 휴지로 눈물을 닦아가며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내 심정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울지 않으려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나네. 여기, 휴지.”

나는 조용히 휴지를 받아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다시 말없이 각자의 편지를 써 내려갔다. 옆에서 그 친구가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받은 휴지를 그 친구에게 다시 건넸다. 그 친구가 고맙다고 말하며, 휴지를 돌려받았다.

그제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편지를 쓰다가 왜 왈칵 눈물이 났는지.

부모님은 더 이상 오성리에 없었다. 교회는 문을 닫았고, 부모님은 오성리를 떠났다. 부모님이 길에 나앉았을 지, 거할 곳을 찾았을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어디로도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써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편지지 위로 투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쓰다만, 편지를 작게 접어 서랍에 넣었다.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고 웅크리고 누웠다. 어둠 속에서, 반팔을 입고 지하철 출구를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날 저녁, 어머니를 따라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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