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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17-18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돌봄의 묵상

      거짓 교사들은 정교한 논리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를 자세히 한 번 살펴보세요. 방심하다가, 혹 하고 넘어갈 정도로 대단합니다.

      “자,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칩시다. 그럼, 과거에 율법이 왜 필요했습니까? 아무 필요도 없는 율법을 우리가 수 천년 동안 지켜왔다는 겁니까? 모세에게 전해주신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뭐가 죄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고요.

      율법을 어떻게 버립니까. 율법을 폐기했다가, 사람들이 ‘응, 나는 구원받았어. 나는 예수님 믿어’라고 말하면서 제멋대로 살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하다고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도 율법 안에서 율법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논리가 이 천 년 전에만 유효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소위, 잘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자꾸 기준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정식 교인 아니다.”

“십일조 안 하면, 직분 받을 자격 없다.”

 

뿐만 아니죠.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 

 

      명분은 분명합니다. 이런 기준이 없으면, 성도들이 나태해져서 올바르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뭐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기준을 제시한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성도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기준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안심하고, 기준 밖으로 나간 사람은 불안합니다. 죄책감의 경계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마다 다르게 제시하는 서로 다른 기준입니다.

      바울이 오늘날의 교회에 편지를 쓴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는 분이냐?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고, 다시 율법을 세워서 사람을 닦달하면, 그야말로 나 자신이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기준은 사람이 세우는 게 아닙니다. 목사가 세우는 게 아닙니다. 기준은 이미 선명하게 정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의 다른 기준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십일조하고 헌금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과정은 은혜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은혜받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억지로 드린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아무 것도 못 드려도 예수님을 사랑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라고 억세게 질문하신다면, 나는 답변하고 싶습니다.

      “그건 나에게 묻지 마시고,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사람들 앞에서 의인 행세하실 필요 뭐가 있나요.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순종, 손가락으로 헤아리면서, 인정해달라고 부탁해보세요. 불안해서 못 견딜 거예요.”

      기준을 강조하면, 복음 없는 사람은 도망쳐 버립니다.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기준을 강조할수록 고통받는 사람은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건 복음이 아닌데….” 하면서도 계속 혼란스럽습니다. 복음과 기준을 함께 지키려 애를 씁니다. 복음으로 감격했다가, 기준으로 시험에 들었다가 정신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숨죽여 조용히 지내면서, 진실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목사의 허물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주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주님만 바라보고 희생해주셨기에, 교회가 무너지지 않은 겁니다. 목사가 설교 잘해서, 교회가 부흥했다고 말할 일 아닙니다. 장로가 헌금 많이 해서, 교회 새로 지었다고 말할 일 아닙니다.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엎드려 기도하던 성도들이 기억납니다. 십분의 일이 아니라, 삶의 전부를 드려도 부족하다고 주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나 같이 철없는 목사, 철없는 설교, 온전히 이해해주고 받아준 사람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은혜받은 사람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립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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