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아, 원두 로스팅 하는 동안 주문 좀 받아줄래?” 

 

문영린은 이른 아침, 카페 문을 연다. 딸의 남자 친구 김지훈이 문영린의 일손을 거들고 있었다. 김지훈은 한 달 전에 군 복무를 마쳤다.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오전에 잠깐 문영린을 돕는 것이다. 

 

원두 로스팅을 할 때마다, 문영린은 예민해졌다. 정확한 시간에 맞춰 기계를 켜고 꺼야 했다. 출근길에 잠시 들러 커피를 주문을 하는 손님을 맞이하다 보면, 로스팅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이 그만두는 바람에 문영린은 난처해졌다. 마침 딸의 남자 친구, 김지훈이 그녀를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로스팅을 마친 문영린은 카페 한 귀퉁이 테이블에 앉았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김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지훈아, 제대하고 쉬고 싶을 텐데 아침 일찍 나와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제대하고 생활리듬 깨질 뻔했는데, 일찍부터 나와 일하니까 좋죠, 뭐. 

 

김지훈은 멋쩍은 듯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테이블 위에 팔을 걸치고 편안하게 서 있던 김지훈은, 문영린의 진지한 질문에 자세를 고쳤다.

 

“조금 있다가 복학해야죠.” 

 

“우리 미혜와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은 거야. 우리 미혜가 그렇게 좋아?” 

 

김지훈의 긴장이 풀어졌다. 

 

“그럼요.” 

 

“뭐가 그렇게 좋은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아요.” 김지훈은 민망함을 감추려고 주문 테이블 구석에 놓인 초콜릿 상자를 문영린에게 가져갔다. 

 

“이거 드셔보세요. 제가 제주도 갔을 때 사온 초콜릿인데, 맛있어요.” 

 

초콜릿을 받아들고 입에 넣으며 문영린이 말했다. 

 

“얼렁뚱당 넘어가려고 하네. 아직 질문에 대답도 안 했어.” 

 

김지훈은 문영린은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미혜를 정말 좋아해요. 제가 군대 있을 때도 한결같이 사랑해줬잖아요. 이제 제가 지켜줄 차례에요.”     

 

문영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젊은 시절 남편과 이혼해 미혜를 혼자 키웠다. 그녀에게 미혜가 전부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동갑내기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당황한 영린이었지만, 지훈의 듬직한 모습에 점차 안심이 되었다. 

 

“둘 만 사이좋게 잘 지내. 싸우지 말고. 그럼 됐지 뭐.” 

 

문영린은 테이블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며 말했다. 

 

“지훈아, 이러다 학원 늦겠다. 어서 가.” 

 

혼자 남은 문영린은 창가에 섰다. 언젠가는 미혜가 그녀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녀는 아직 미혜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김지훈이 믿음직스러운 것과 미혜를 떠나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긴 한숨을 쉬면서, 에스프레소를 내려마셨다. 진하게 농축된 커피 향기가 그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을 잠시 동안 풀어주었다.  

 

늦은 오후, 미혜에게 문자가 왔다. 문영린은 문자의 내용을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번 세 번 다시 읽어봐도, 그녀가 제대로 문장을 읽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엄마, 아침에 내 초콜릿 먹었어? 그거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엄마가 먹어?”

 

기가 막혀 눈물이 났다. 딸에게 답장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문영린은 김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훈아, 지금 잠시 통화되니? 미혜가 나한테 말도 안 되는 문자를 보냈어. 도대체 무슨 일인 거야. 미혜가 나한테 이럴 리 없는데, 너희 둘이 무슨 일 있었어?”

 

김지훈도 당황한 듯 말했다. 

 

“모르겠어요. 미혜가 이상해요. 점심시간에 미혜하고 잠깐 통화하면서 어머니도 초콜릿 좋아하신다고 말했거든요.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말했는데, 그다음부터 미혜가 다짜고짜 화를 내더라고요. 퇴근하고 보기로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저녁 늦게 미혜가 술에 취해 들어왔다. 문영린은 딸의 모습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등짝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늦었어. 빨리 씻고 자. 내일 출근해야지.”  

 

미혜는 몸을 가누기도 힘든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거 왜 먹었어? 그게 엄마 거야? 그거 내 거야. 지훈이가 나 주려고 사온 거라고. 엄마 눈에 보이면, 그게 다 엄마 거야? 다 엄마 거냐고!” 

 

문영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미혜에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이 미친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엄마가 초콜릿 하나 먹었다고 이 지랄이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들도 안 그러겠다. 이 미친년아!” 

 

미혜는 지지 않고 말했다. 

 

“매일 똑같은 소리지. 누가 엄마 보고 희생하랬어? 지금 보상받고 싶어 하잖아. 나는 평생 엄마가 시키는 대로 살았어.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다고. 내 인생이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앞으로 내 인생에 끼어들지도 말고, 내 물건도 건드리지 마. 나 이제 엄마랑 안 살아! 지긋지긋해.” 

 

문영린은 미혜와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누웠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슬픈 감정을 덜어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문영린은 식탁 위에 놓인 짧은 메모지를 발견했다. 미혜가 남기고 간 메모였다. 

 

“엄마, 나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 혼자 살 거야. 갑자기 결정한 거 아니야.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생각했어. 엄마도 이제 엄마 인생 살아. 나도 내 인생 살 거니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자리에 쓰려져 하염없이 울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카페에 나갔다.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김지훈이 문영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머니,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미혜가 지금 제가 사는 오피스텔에서 함께 지내고 있어요. 이건 아니라고 계속 설득했는데, 소용없더라고요. 제가 잘 타일러서 돌려보낼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꼭 돌려보낼게요. 죄송합니다, 어머니.”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영린의 세상은 종말을 맞이했다. 

 

딸은 반 년이 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에 시달렸다. 고소하고 향긋한 커피향마저도 그녀에게 쓰디쓰게 느껴졌다.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갈 뿐이었다.   

 

“초콜릿 하나로 이렇게 될 수 있는 건가요? 이제 초콜릿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아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날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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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딸이 집을 나간 이유가 무엇일지 오랫동안 진지하게 고민해보셨을 것 같아요.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초콜릿이죠. 초콜릿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딸이 문자로 ‘왜 먹었냐고’ 따졌을 때, 그냥 미안하다고 말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지훈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문제가 더 커졌나.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뭔가 마음이 불편했겠죠, 미혜도.”  

 

그녀는 초콜릿이라는 단편적인 사건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건 자체가 없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그 당시 엄마가 다른 반응을 보였다면’이라는 가정은,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만약 초콜릿을 먹지 않았다면, 그녀의 딸이 집을 나가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엄마가 딸의 초콜릿을 먹었다는 것, 그것이 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다 큰 애가 초콜릿 하나 먹었다고, 그럴 수가 있나요. 저는 평생 동안 미혜를 위해 희생했어요. 미혜가 잘 되기를 바랐죠. 아빠 없는 아이, 기죽이지 말라고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나는 그녀의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싶었다. 그녀가 튕겨나가지 않도록 신중해야 했다. 

 

“저 역시도 다 큰 딸이 초콜릿 하나로 집을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빙산은 실제로 전체 크기의 10분의 1 밖에 되지 않아요. 나머지 10분의 9는 바다 아래 잠겨 있거든요. 

 

딸이 집을 나간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초콜릿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을지 몰라요. 

 

제가 집중하고 싶은 부분은 딸과 엄마의 관계에요.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문제가, 초콜릿이라는 매개체로 촉발된 거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제서야, 그녀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아, 그렇군요. 그 말을 들으니까, 생각나는 게 있어요. 미혜가 술에 취해 들어온 날, 제게 한 말이 있어요. 그 말이 미혜의 진심일지도 몰라요. 자기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엄마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딸을 엄격하게 키웠거든요.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쉴 틈 없이 몰아붙였어요. 그 덕분에 좋은 대학에 갔잖아요. 졸업하자마자 취직도 바로 되고요. 머리는 좋은 아이였어요. 그러니까, 그만큼 투자를 했겠죠.” 

 

나는 또다시 질문했다. 

 

“만약에 제가 딸을 찾아가서, ‘당신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딸이 뭐라고 대답할까요?”

 

물론, 실제로 그녀의 딸을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녀와 딸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글쎄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딸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천천히 대답할게요.”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 힘겹게 말했다. 

 

“아마도, ‘엄마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미혜는 아마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릴 것이라 미리 예상했는지, 그녀는 가방에서 새것처럼 보이는 손수건을 꺼냈다. 어쩌면, 그녀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손수건을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손수건은 그녀의 비장한 의지를 보여주는 단서다.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실을 꺼내고자 하는 그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만약 딸이 ‘엄마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실 수 있나요?” 

 

“아니요. 딸에게 진지하게 단 한 번 만이라도 제대로 말하고 싶어요. 오해라고. 그거 정말 오해라고.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실 딸에게 아직 말해주지 못한 비밀이 있어요.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둔 비밀이 있는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잠시 동안 대화를 멈추었다. 그녀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흐느껴  울었다. 수문이 열리듯, 그녀는 십수년 동안 간직했던 눈물을 방출하는 듯했다.   

 

#

 

“여보, 정말 미안해. 잠깐 실수한 거야. 다시는 안 그럴게. 한 번 만 용서해줘.”

 

문영린의 남편은 거실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일주일 전, 바다낚시를 간다며 집을 나간 남편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 문영린의 고등학교 동창이 우연히 두 사람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문영린은 남편의 진심을 느낄 수 없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세 번 무릎을 꿇는 동안, 남편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했다. 더 이상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혜가 여섯 살 때였다. 아빠가 눈앞에서 사라진 그날부터 미혜는 아빠를 찾았다. 아내에게는 무뚝뚝하고 이기적인 남편이었어도, 딸에게만큼은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던 남편이었다.  

 

문영린은 남편과 이혼한 이유를 딸에게 말할 수 없었다. 미혜가 어릴 때, 아빠가 외국으로 돈을 벌러 나갔다고 했다. 미혜는 착각했을 것이다. 미혜가 누리는 삶이 아버지가 벌어다 준 돈 때문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 보태지 않았다. 

 

미혜가 고등학생 때, 엄마에게 진지하게 아빠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더 이상 궁색한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을 문영린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미혜는 진실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문영린은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딸에게 아버지가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미혜는 궁금했을 것이다. 외국으로 돈을 벌러 나간 아빠가 왜 전화 한 통 없는지. 미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의 가족들은 집안 어른들 보기 부끄럽다며, 조용히 가족장을 치렀다.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고 나서야, 시누이에게 전화 한 통 받은 것이 전부였다.

 

문영린은 알 수 없었다. 미혜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차라리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낫다고 여러 번 생각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물러섰다. 미혜의 높은 성적이 곤두박질칠까 그녀는 두려웠다. 입시가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을 말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에둘러 말하며 진실의 순간을 외면했다. 

 

미혜가 대학에 입학하고,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아빠에 대해 물었을 때도 문영린은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제 문영린 스스로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했다. 

 

제대한 남자 친구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미혜가 말했을 때, 문영린은 단 번에 딱 잘라 말했다. 

 

“그딴 생각 하지도 마. 너는 엄마처럼 살면 안 돼. 연애만 해. 결혼 따위는 생각하지도 말고.” 

 

미혜는 처마 아래 매달린 고드름처럼 서서히 얼어붙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아차, 했던 문영린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직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리잖아. 지훈이도 제대한 지 얼마 안 됐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문영린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녀가 내뱉은 말은 바람에 날린 민들레 씨앗처럼 홀홀 날아가 미혜의 황량한 가슴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렸다. 

 

미혜의 시선에서 문영린은 이기적일 것이다.  미혜는 아버지가 보고 싶다. 그러나, 아버지를 볼 수 없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조차 미혜는 알지 못한다. 문영린은 그만큼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두 사람 사이에 등장했을 때, 문영린은 서툴렀다. 성급하게 내뱉은 말 하나로, 미혜의 판단이 뒤집혔다. ‘엄마가 날 위해 희생했다’ 가 아니라, ‘내가 엄마를 위해 희생한 것’으로. 명백한 오해였지만, 미혜의 세상에서는 진실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 사건이 있었던 바로 다음 날, 문영린은 미혜의 문자를 받은 것이다.

 

“엄마, 아침에 내 초콜릿 먹었어? 그거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엄마가 먹어? 그거 왜 먹었어? 그게 엄마 거야? 내 거야. 엄마 눈에 보이면, 그게 다 엄마 거야? 다 엄마 거냐고!”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폭발물에 불꽃이 튀어버린 것이다. 작은 불꽃이라도 충분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일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을 날려 버릴 것이다. 모녀 관계조차도. 

 

문영린의 세상에서는 초콜릿이 보인다. 미혜의 세상에서는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는, 어두침침한 탄약고가 보인다. 같은 사건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르게 보인다. 문영린이 아는 만큼, 미혜도 알아야 한다. 두 사람의 시선에 겹치는 지점에  공감이라는 해독제가 놓여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문영린에게 기회가 있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도화선을 따라 거세게 타들어가는 불씨를 발로 짓밟아 꺼야 한다. 어두침침한 탄약고에서 울고 있는 딸을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문영린 뿐이다. 

 

김지훈의 오피스텔은 미혜의 안식처가 아니다. 도피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미혜가 안식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잠시라도 쉴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미혜는 돌아올 명분이 필요할지 모른다.    

 

 

“미혜하고 영화를 봤어요.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했고요. 지훈이와 지내는 게 불편한 가봐요. 다음 주에 집에 들어갈 테니, 자기 방 좀 치워놓으라고 하더라고요. 

 

피식 웃으면서 ’엄마가 무슨 청소부니?’라고 말을 하는데, 고마워서 눈물이 났어요. 

 

미혜도 말없이 따라 울더라고요. 그날은 서로 그렇게 울기만 했어요. 딸이 다시 돌아오면, 거실에서 두런두런 못다 한 이야기해야죠. 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제자리에서 서서 그녀의 뒷모습에서 바라봤다. 세월의 거센 흔적이 깃든 흰머리조차도 내게는 찬란한 광채로 느껴졌다. 상담실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그녀에게 상담실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도피처였던 것이다. 안식처는 그녀의 집이다. 딸과 함께 머무는 그녀의 가정인 것이다. 언젠가 딸이 엄마를 떠날 때, 그녀는 행복한 미소로 보내줄 것이다. 그녀의 뒷모습이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