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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지우고, 진실은 남긴다 

연수는 잠시 멈칫했다. 

 

신중하게 내 표정을 살폈다. 나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 물 밖에서 물속의 깊이를 알 수 없듯, 연수는 내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는 온화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학원 기사 아저씨가 있었거든요. 그 아저씨에게 순결을 잃었어요.” 

 

내가 멈칫하는 순간, 연수는 마치 내가 질문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왜 신고하지 않았냐고요? 그때 당시에는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학원의 운행노선 끝자락에 연수의 집이 있었다. 학원차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 앞에 머물렀다.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집 안의 모든 불은 이미 꺼진 후였다. 그녀가 오기 전에 모두가 잠든 것이다. 

 

연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사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덕분에, 아저씨는 그녀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었다.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연수는 학원 아저씨와 단둘이 집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아저씨는 연수의 생일을 기억했다. 텅 빈 차 안에서 그녀에게 생일 선물을 건넸다. 목도리였다. 아저씨는 연수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연수를 끌어안았다.

 

한 시간이나 늦게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연수를 맞이한 것은, 환하게 빛나는 생일 케이크이 아니었다. 적막한 어둠뿐이었다. 생일 저녁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연수의 순결을 목도리와 맞바꿨다는 사실을 가족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연수는 엄마에게 학원을 옮겨달라고 말했다. 연수의 엄마는 딸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학원을 옮겨달라고?” 

 

연수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감정이 상했다. “됐으니까, 알아서 하겠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더 이상 학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까운 독서실에 다녔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녀는 목도리를 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도리로 목을 감싸자 온기가 느껴졌다. 

 

연수는 목도리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10년이 지났지만, 연수는 그때의 사건과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제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되돌릴 수 없어 슬펐고요.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많이 울었어요.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슬펐고, 그런 일을 당했는데 싫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슬펐어요. 저는 많이 외로웠거든요.” 

 

기사 아저씨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학원을 끊은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받은 기억은 소중했다. 아저씨의 따뜻한 표정, 친절한 말투가 그리웠다. 

 

목도리를 두를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연수는 끔찍한 기억을 뒤로하고, 좋은 기억만을 간직했던 것이다. 

 

그녀는 10년이나 지나버린 일을 들춰내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니었다. 

 

연수는 엄연히 현실의 문제로 고통받았다. 

 

연수의 남자가 떠났다.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3개월이 지났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 역시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고통받았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녀의 상실감이 전해졌다. 그녀의 교제 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4살 연상의 남자, 제준을 크리스천 데이팅 앱으로 만났다. 눈에 띄는 외모였다. 크리스천으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그에게 끌렸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 중에 크리스천은 없었다.  

 

그동안 연수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들과 사귀었다. “좋아한다, 사귀자”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사귀자.” 그녀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제준은 신중한 남자였다. 사귀자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 한 번 사귀어보면 어떨까요?” 

 

연수가 먼저 물었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먼저 남자에게 사귀자고 말한 것은….  

 

그가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제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연수 씨를 정말로 좋아하는 건지,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연수 씨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제가 먼저 말할게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사려 깊은 남자였다. 그날 이후 연수는 새벽예배를 다니면서, 제준과의 만남을 위해 기도했다. 그를 좋아하는 감정만큼 그녀의 기도 역시 간절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제준은 연수와 함께 했다. 그가 사귀자고 말했을 때, 연수는 눈물을 흘렸다. 외로움으로 고통받았던 아픔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함께 했다. 연수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곧 결혼할 사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완벽한 남자였다. 하루하루가 행복할 뿐이었다. 자신 안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줄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도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나 사실 오빠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어. 오빠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이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 

 

연수는 목도리에 대해 말했다. 

 

제준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는 “괜찮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홀가분했다. 제준은 몇 마디 말로, 연수를 위로했다. 평소처럼, 둘은 함께 식사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걸었다. 단 하나의 절차만이 생략되었다. 그날 밤, 제준은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제준이 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시간 되면, 잠깐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연수는 제준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당황했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일찍 회사를 나왔다. 

 

그녀가 찾은 곳은 병원이 아니라, 그를 만나기로 한 카페 근처 공원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던 그녀는 하염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나 도착했어. 어디야?” 

 

카페에 먼저 도착한 제준이 전화를 걸 때까지, 연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공원을 누볐다. 땀으로 화장이 망가져 버렸다. 공원 화장실에서 얼굴을 대충 고치고, 제준의 앞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제준이 말했다. 

 

“나 오래 생각해봤는데,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면, 네가 오해할까 싶어 만나서 직접 설명하고 싶었어. 

 

목도리 사건,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는 동안,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가 아직 이별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 같아. 너를 정말로 사랑한 건지, 아니면 내가 외로워서 너를 만난 건지 판단이 안 서거든. 

 

사랑해서 사귄 거라고 믿었는데, 점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 더 늦기 전에,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연수는 침묵했다. 

 

연수의 침묵이 불안했는지, 제준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연락은 계속해도 되는 거지?” 

 

연수가 제준에게 물었다. 

 

“그건 너 편할 대로 해. 그게 전부야?” 

 

제준은 당황한 듯 말했다. 

 

“응, 그게 전부야.” 

 

그러나, 제준은 연수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마 제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저는 솔직히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연락이라도 받아주면, 언젠가 기회가 다시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연수는 제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연수에게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로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관점에서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이상한 남자다.  

 

제준이라는 남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자기 외로움을 달래려 연수을 선택했고, 그녀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자 자기 외로움을 핑계로 그녀를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연수을 진지하게 만나려는 의도가 없었을지 모른다. 제준은 본능적으로 연수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귀자고 말한 첫날 그는 연수를 안았다. 사귀는 것과 자는 것, 어쩌면 그에게 같은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목도리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거짓처럼 보였다. 연수가 비밀을 털어놓은 그날 밤, 그는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연수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그가 마음을 닫지 않았을까? 

 

그의 말과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준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고 말고를 결정할 것인가?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연수는 상처의 늪에 빠져버렸다. 취약한 그녀가 더욱 취약해진 것이다. 

 

나는 제준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넬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무엇이 그녀를 취약하게 만든 것인가. 목도리 이전의 사건들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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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년은 왜 여기 서 있어. 걸리 적 거리게.” 

 

할머니는 분을 못 참고, 어린 연수의 뺨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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