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는 잠시 멈칫했다. 

 

신중하게 내 표정을 살폈다. 나의 반응이 궁금한 것 같았다. 물 밖에서 물속의 깊이를 알 수 없듯, 연수는 내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는 온화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학원 기사 아저씨가 있었거든요. 그 아저씨에게 순결을 잃었어요.” 

 

내가 멈칫하는 순간, 연수는 마치 내가 질문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왜 신고하지 않았냐고요? 그때 당시에는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학원의 운행노선 끝자락에 연수의 집이 있었다. 학원차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 앞에 머물렀다.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집 안의 모든 불은 이미 꺼진 후였다. 그녀가 오기 전에 모두가 잠든 것이다. 

 

연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사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덕분에, 아저씨는 그녀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었다.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연수는 학원 아저씨와 단둘이 집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아저씨는 연수의 생일을 기억했다. 텅 빈 차 안에서 그녀에게 생일 선물을 건넸다. 목도리였다. 아저씨는 연수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연수를 끌어안았다.

 

한 시간이나 늦게 학원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연수를 맞이한 것은, 환하게 빛나는 생일 케이크이 아니었다. 적막한 어둠뿐이었다. 생일 저녁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연수의 순결을 목도리와 맞바꿨다는 사실을 가족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연수는 엄마에게 학원을 옮겨달라고 말했다. 연수의 엄마는 딸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학원을 옮겨달라고?” 

 

연수는 엄마의 말 한마디에 감정이 상했다. “됐으니까, 알아서 하겠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더 이상 학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까운 독서실에 다녔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녀는 목도리를 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도리로 목을 감싸자 온기가 느껴졌다. 

 

  연수는 목도리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10년이 지났지만, 연수는 그때의 사건과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제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되돌릴 수 없어 슬펐고요.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많이 울었어요. 내가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 슬펐고, 그런 일을 당했는데 싫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슬펐어요. 저는 많이 외로웠거든요.” 

 

기사 아저씨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학원을 끊은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받은 기억은 소중했다. 아저씨의 따뜻한 표정, 친절한 말투가 그리웠다. 

 

목도리를 두를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연수는 끔찍한 기억을 뒤로하고, 좋은 기억만을 간직했던 것이다. 

 

그녀는 10년이나 지나버린 일을 들춰내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일까? 

 

아니었다. 

 

연수는 엄연히 현실의 문제로 고통받았다. 

 

연수의 남자가 떠났다. 어떻게든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3개월이 지났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전화는 물론이고 문자 역시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고통받았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녀의 상실감이 전해졌다. 그녀의 교제 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4살 연상의 남자, 제준을 크리스천 데이팅 앱으로 만났다. 눈에 띄는 외모였다. 크리스천으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그에게 끌렸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 중에 크리스천은 없었다.  

 

그동안 연수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들과 사귀었다. “좋아한다, 사귀자”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와 사귀자.” 그녀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제준은 신중한 남자였다. 사귀자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 한 번 사귀어보면 어떨까요?” 

 

연수가 먼저 물었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먼저 남자에게 사귀자고 말한 것은….  

 

그가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제가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연수 씨를 정말로 좋아하는 건지, 외로움을 달래려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연수 씨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제가 먼저 말할게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사려 깊은 남자였다. 그날 이후 연수는 새벽예배를 다니면서, 제준과의 만남을 위해 기도했다. 그를 좋아하는 감정만큼 그녀의 기도 역시 간절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제준은 연수와 함께 했다. 그가 사귀자고 말했을 때, 연수는 눈물을 흘렸다. 외로움으로 고통받았던 아픔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함께 했다. 연수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곧 결혼할 사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연수에게 제준은 완벽한 남자였다. 하루하루가 행복할 뿐이었다. 자신 안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줄 사람이라고 믿었기에, 언젠가는 진실을 말해도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나 사실 오빠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어. 오빠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이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 

 

연수는 목도리에 대해 말했다. 

 

제준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는 “괜찮다”라고 말했다. 

 

연수는 홀가분했다. 제준은 몇 마디 말로, 연수를 위로했다. 평소처럼, 둘은 함께 식사하고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걸었다. 단 하나의 절차만이 생략되었다. 그날 밤, 제준은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제준이 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시간 되면, 잠깐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연수는 제준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당황했다. 손이 떨리고 가슴이 답답해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일찍 회사를 나왔다. 

 

그녀가 찾은 곳은 병원이 아니라, 그를 만나기로 한 카페 근처 공원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던 그녀는 하염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나 도착했어. 어디야?” 

 

카페에 먼저 도착한 제준이 전화를 걸 때까지, 연수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공원을 누볐다. 땀으로 화장이 망가져 버렸다. 공원 화장실에서 얼굴을 대충 고치고, 제준의 앞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제준이 말했다. 

 

“나 오래 생각해봤는데,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으면, 네가 오해할까 싶어 만나서 직접 설명하고 싶었어. 

 

목도리 사건,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 때문에 헤어지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만나는 동안,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가 아직 이별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 같아. 너를 정말로 사랑한 건지, 아니면 내가 외로워서 너를 만난 건지 판단이 안 서거든. 

 

사랑해서 사귄 거라고 믿었는데, 점점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 더 늦기 전에,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 

 

연수는 침묵했다. 

 

연수의 침묵이 불안했는지, 제준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연락은 계속해도 되는 거지?” 

 

연수가 제준에게 물었다. 

 

“그건 너 편할 대로 해. 그게 전부야?” 

 

제준은 당황한 듯 말했다. 

 

“응, 그게 전부야.” 

 

그러나, 제준은 연수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마 제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저는 솔직히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연락이라도 받아주면, 언젠가 기회가 다시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연수는 제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연수에게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로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상식적인 관점에서 제준은 이상적인 남자가 아니라 이상한 남자다.  

 

제준이라는 남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자기 외로움을 달래려 연수을 선택했고, 그녀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자 자기 외로움을 핑계로 그녀를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연수을 진지하게 만나려는 의도가 없었을지 모른다. 제준은 본능적으로 연수가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귀자고 말한 첫날 그는 연수를 안았다. 사귀는 것과 자는 것, 어쩌면 그에게 같은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목도리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거짓처럼 보였다. 연수가 비밀을 털어놓은 그날 밤, 그는 연수를 안아주지 않았다.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연수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그가 마음을 닫지 않았을까? 

 

그의 말과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준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고 말고를 결정할 것인가?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연수는 상처의 늪에 빠져버렸다. 취약한 그녀가 더욱 취약해진 것이다. 

 

나는 제준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넬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 무엇이 그녀를 취약하게 만든 것인가. 목도리 이전의 사건들을 알아야만 한다. 

 

#

 

“이 미친년은 왜 여기 서 있어. 걸리 적 거리게.” 

 

할머니는 분을 못 참고, 어린 연수의 뺨을 후려쳤다. 

 

“왜 애한테 화풀이를 하세요!”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격한 몸싸움을 했다. 

 

연수의 나이 여섯 살,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가족은 친할머니 댁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밤늦도록 일에 매달렸다. 고부 갈등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가 밤늦도록 일에 매달리는 사이,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에 대한 분풀이를 며느리에게 쏟아부었다. 엄마는 질세라 할머니에게 덤벼들었다. 엄마의 잘못이라면, 무능한 남자와 결혼한 것뿐이었다.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가 격하게 다투는 날이면, 살림살이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어린 그녀는 방구석에 움츠러들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울었다. 한바탕 소동이 나면, 어린 그녀는 엄마에게 다가가 엄마 무릎에 앉았다. 

 

딸을 안아줄 여유가 없었던 엄마는 연수을 땅에 내려놓고, 뒤돌아 앉았다. 

 

엄마가 뒤돌아 앉은 날이면, 그녀는 할머니 감정이라도 풀어보려는 듯, 할머니를 주변을 서성거렸다. 할머니는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감정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할머니는 며느리가 보라는 듯이 어린 손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어린 그녀는 균형을 잃었다. 옆으로 주춤거리며 몇 발을 내딛다,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엄마가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할머니는 엄마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와 할머니, 두 사람이 체력이 다해 스스로 멈출 때까지 싸움은 계속됐다. 

 

#

 

다음 날 아침, 그녀의 볼에 파란 멍이 들었다. 선명하게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어린 연수가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어린이집 안 가면 안 돼? 너무 창피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수의 머리카락에 빗질을 하며, 머리카락을 바짝 묶어 올렸다. 

 

“엄마, 머리 너무 세게 묶지 마. 아프단 말이야.”  

 

아프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엄마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딸의 머리카락을 끌어 머리 한가운데서 세게 묶었다. 

 

엄마가 같이 나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오늘 안 데려다줘?”  

 

엄마의 표정은 차가웠다. 파리를 내쫓는 손동작으로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연수는 혼자 주섬주섬 신발을 신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자, 또래 친구들이 각자의 엄마와 함께 공터로 모여들였다. 곧 어린이집 차량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혼자 멍하게 서 있던 그녀에게, 옆집 아줌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 너 얼굴이 왜 그러니?” 

 

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 어른들이 때렸니?” 

 

연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충격을 받은 듯,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누가?” 

 

“할머니….” 

 

“할머니가?”

 

연수는 파랗게 멍든 볼을 손으로 숨기고, 고개를 끄떡였다. 

 

옆집 아줌마는 그럴 리 없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옆집 아줌마의 반응에, 연수의 등골이 오싹했다. 

 

여섯 살 아이가 섬뜩한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일부러 머리를 묶어 올렸을지 모른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선명한 멍 자국을 온 동네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마을에서 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던 할머니는 후한 인심으로 평판이 좋았다. 사나운 며느리를 만나 노년이 불행해졌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바라보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멍 자국은 그녀의 할머니가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날 밤, 할머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에게 달려들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동네 사람들이 나를 개처럼 쳐다보는 거여!” 

 

#

 

그녀는 아픈 과거를 회상하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 지난 일이라는 듯,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니는 독했어요.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엄마를 들들 볶았죠. 엄마는 우울증이 분명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쯤인가, 아빠와 같이 살게 됐어요. 아빠도 자기 나름대로 악착같이 산 거죠. 사업으로 돈을 조금 번 것 같았어요. 

 

할머니 집에서 벗어나 엄마 아빠랑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완전한 착각이었죠.”

 

“아빠, 자꾸 어디 가?”

 

“잠시만,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와서….” 

 

아빠는 저녁을 사준다며, 연수가 다니는 학원 앞으로 찾아왔다. 아빠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아빠는 연수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밖으로 나가 전화 통화를 했다. 

 

아빠가 다시 와서 앉았을 때, 연수가 물었다. 

 

“아빠, 혹시 엄마 몰래 만나는 여자 있어?” 

 

아빠는 정색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 없이….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아빠 오늘 평소와 다른 거 알지?” 

 

철없는 아빠는 딸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사업하다가 잠시 만난 여자가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연락을 해. 아빠가 외로울 때, 잠시 만났던 사람이야. 이제 엄마랑 너랑 같이 사니까 아빠가 알아서 정리할게. 그때까지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꼭 비밀 지켜야 해.” 

 

그녀의 눈에 비친 아빠는, 덩치만 큰 철부지 어린애였다. 아빠가 없는 동안, 엄마와 딸이 흘린 눈물, 고통스러운 날들은 새로 장만한 아파트로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연수는 아빠의 비밀을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산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진다면, 이제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녀는 침묵을 선택했다. 

 

며칠 후, 엄마가 연수에게 심문하듯 물었다.

 

“너 알고 있었지?”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뭘?” 

 

“아빠 말이야. 다른 여자 만나는 거 알고 있었잖아?” 

 

“아빠가 그래?” 

 

“알고 있었네. 엄마한테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 

 

엄마는 말 대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미리 말했으면, 엄마가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연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나한테 그래?”

 

“너도 똑같아. 하는 짓이 어떻게 그렇게 아빠를 닮았니?” 

 

연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연수가 대들자,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오열하며 살림살이를 부수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연수에게 던졌다. 

 

삐리릭.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난장판이 된 거실 한가운데 서서 아내에게 말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아빠가 순간 멈칫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연수을 바라보며, 궁색하게 물었다. 

 

“연수아, 너 엄마한테 말했니?” 

 

연수는 폭발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뭐 어쩔래! 왜 전부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엄마는 남편을 쏘아보고, 돌아서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빠가 연수에게 말했다.   

 

“이런 미친년. 아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빠가 오해라고 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몇 번을 말했어? 계속 연락을 해서, 아빠도 힘들다고 말한 거잖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에게 말하면 어떻게 해? 널 믿은 내가 바보지.” 

 

그녀의 아빠는 굳게 닫혀버린 안방 문 앞에서, 엄마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여보, 오해야. 정말 오해라고. 내가 설명할게. 문 좀 열어 봐.” 

 

연수는 견딜 수 없었다. 집을 뛰쳐나갔다. 텅 빈 운동장 한 귀퉁이에 앉아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아직도 두 분은 저를 오해하고 있을 거예요. 나 때문에 이혼할 뻔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오해를 바로잡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그냥 두 분이 한심하다고 생각거든요.

 

엄마도 아빠도, 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 안 하셨어요. 학교 보내주고, 학원 보내주고. ‘그거면 됐지’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

 

그녀의 과거에서 나는 치명적인 손상을 발견했다. 그녀는 거절과 비난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내다 버린 감정은 고스란히 마음에 담는다.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 되는 감정조차, 그녀는 거부할 수 없다.

 

제준은 자신 안의 외로움을 연수라는 존재로 달랬다. 안전한 방식으로 자신 안의 욕구를 채우고, 연수을 버리고 떠났다. 

 

학원 운전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 연수의 취약함을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채웠다.  

 

그녀는 평생 목마른 사람처럼, 사랑을 구걸하며 다닐지 모른다. 자기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남이 베푸는 작은 호의에 마음이 끌리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의지해 살아갈지 모른다. 

 

평생을 외로움으로 허덕였던 그녀의 삶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상담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

 

“얼굴에 멍이 들어, 혼자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는 어린 연수가 기억나세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기억나요.” 

 

“어린 연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글쎄요…. 아마도 외로움이 아닐까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공터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가 불쌍해 보이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이제부터 나와 잠시 역할극을 해 볼 거예요. 조금은 어색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주세요.” 

 

 

나는 혼자 공터에 서 있는 어린 연수에게로, 현재의 연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어린 연수를 역할을 맡았고, 그녀는 현재의 자신이었다. 

 

나는 어린 연수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고, 현재의 연수에게 “도와달라”라고 말했다. 

 

현재의 연수는 어린 연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연수를 위로해줄 말이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상처 입은 자신을 공터에 버려두고 방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상처 입은 자신과 마주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이 스쳐 지나갔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터에 혼자 서 있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못 해주고, 그 옆에서 서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말속에 깊게 배어든 절망감이 내게 전해졌다. 

 

나는 그녀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야 했다. 

 

“다시 한 번 작업을 시도할 거예요. 지금처럼 솔직하게 반응해주시면 돼요. 그럼, 시작해 볼게요.”

 

나와 그녀 사이에 그리스도가 계시듯, 상처 입은 그녀와 현재의 그녀 사이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다. 

 

현재의 그녀가 어린 연수를 그리스도에게 데려다준다면,  그녀는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나는 정말로 궁금했다. 

 

그녀는 어렵게 첫 마디를 꺼냈다. 

 

“예수님, 이 아이는 어린 시절 저예요.” 

 

그녀의 감정이 동요했다.  

 

“저는 상처가 많아서, 도저히 연수를 돌봐줄 수 없어요. 이십 년이 지나도 연수는 스스로를 돌볼 수 없어요. 너무 불쌍한 아이에요. 

 

제가 치유돼서 연수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예수님이 대신 돌봐주시면 안 돼요? 

 

예수님이 연수를 잠시만 맡아주세요. 제가 치유되면… 어린 연수를 찾으러 올게요….” 

 

그녀는 오열하며 울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나 역시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들고 있던 노트에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녀의 말을 받아 적던 메모가 번졌다. 

 

나는 잉크가 번져나가는 노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녀가 마음껏 울도록 충분한 시간을 줬다. 

 

#

 

그녀의 감정이 차분해졌을 때,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때, 예수님의 표정이 어떠셨나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녀가 만난 예수님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따뜻했다. 정서적, 신학적으로 온전한 예수님이셨다. 

 

내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할 때에도, 나를 돌봐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상처 입은 나를 예수님께 데려다줄 수 있다니, 그 자체만으로 안심이 돼요. 

 

지금까지 나는, 다른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거든요.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끊을 수 없었어요. 

 

말씀해주신 대로, 상처에는 완치가 없다는 말에 동의해요. 과정이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제부터, 저는 나 자신을 돌볼 거예요. 절대로 공터에서 혼자 울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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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그녀와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나의 예수님은 그녀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녀보다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우고, 더 많은 시간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따뜻함에 관한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구를 원망하겠나. 아무도 원망할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상처 입은 나 자신을 예수님께 내어 맡긴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홀로 갇혀 매질을 당하는 아이는 삼 십 년이 지나도, 두려움에 떤다.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으로 평생을 고통받는 아이는, 여전히 두려운 채로 상담실 안에 머문다. 

 

좁고 어두운 방 안에, 자신을 만나주셨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직접  다시 만날 때까지 좁고 어두운 방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의 예수님은 따뜻하지 않아도,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따뜻하시다. 나는 같은 공간에서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공간이 좁을수록, 따뜻하다. 

 

내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어쩌면, 나는 사랑받기 위해,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따뜻한 예수님이 미치도록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