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아내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을 망치고 있거든요.”

 

     N은 마흔둘, 열 살 아들, 일곱 살 딸의 아빠다. 그는 아내가  과도할 정도로 아이들 교육에 집착하는 것을 걱정한다. 임신한  순간부터 아내는 태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고, 아이의 두뇌 발달에 도움을 주는 음악을 듣고, 정서에 도움이 된다는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남편도 아내의 적극적인 노력이 싫지 않았다. 웹서핑을 하다가 유익한 정보를 발견하면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주기도 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첫 아이가 태어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이 생각할 때, 아내는 너무 이른 나이부터 아들에게 글자와 숫자를 가르쳤다. 아이가 하기 싫다고 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식으로 아이를 달래면서 공부를 시켰다. 아내의 양육 방식에 대해 남편이 대화를 시도하면, 그녀는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잔소리를 한다고 입을 막아버렸다.

 

     남편은 아이들과 마음껏 놀 수도 없었다. 학원 숙제, 엄마가 내준 숙제를 하느라 아이들이 바빴다. 남편이 애들 얼굴이라고 보고 싶어서 아이들 방문을 열면, 아내가 거실에서 말했다. 애들 방해하지 말고 방에서 나오라고.

 

     “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첫째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는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에요. 도대체 아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과연 나중에 애들이 엄마에게 고맙다고 할까요? 아닐 걸요. 지금 애들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밖에서 뛰어놀아야 한다고요. 우리 애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과 뭐가 달라요? 전 아내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어요.”

 

     아내도 가만있지 않았다.

 

     “여보, 당신은 참 마음 편하게 산다. 아파트의 다른 엄마들 이야기를 좀 들어보라고. 우리 애들만 놀이터에서 키우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알아? 바보 되는 거야. 우리 어린 시절하고 완전히 다르다고. 애들이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려주다가 애들 기죽으면 어떻게 할 건데? 학교 수업을 못 따라간다니까. 다른 애들은 선행을 다 해서 따라갈 수가 없다고.

 

     그러면 학교에서 전화 온대. 학원 보내라고.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안 도와줘도 되니까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 나도 힘들어.”

 

     남편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이건 아동학대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여보, 제발 그만해.”

 

     아내는 ‘아동학대’라는 말을 듣고 눈이 뒤집혔다.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처음 보는 아내 모습이었다. 남편은 절망했다.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부터 남편은 아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불만을 느껴도 표현하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들을 혼내는 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들리면 밖으로 나갔다. 매번 아내와 다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파트 주변을 한 바퀴를 돌며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어 보지만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남편이 아동학대라는 표현을 쓰다니요. 말도 안 되죠. 그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거라고요. 제가 하루 동안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남편이 알아야 해요. 아이들 준비시켜서 학교에 보내고, 집안일을 하고, 간식을 준비하고, 공부시키고, 저녁 준비를 하고, 애들을 씻기고 재워요.

 

     남편은 집에 와도 도와줄 생각은 안하죠.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런 말은 누가 못하나요. 남편은 아이들만 걱정하지 제 걱정은 전혀 안 해요. 저도 지쳤어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남편은 버스가 하루에 일곱 번 밖에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자랐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나 셋. 셋째 누나와 여섯 살 터울이 지는 막내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다.

 

     다른 집 아이들은 어린 시절 농사일을 도와주러 밭에 나갔지만 남편 부모님은 절대로 일을 시키지 않았다. 누나 셋이 일을 거들었다. 남편은 책을 좋아했고, 공부도 제법 잘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오고가는 시간이 아까워 영어 단어를 외웠다. 중학교 졸업하고 수도권에 있는 명문고에 진학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갔다.

 

     “공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죠. 만약 부모님이 강제로 공부를 시켰다면 저는 절대 공부하지 않았을 거예요. 필요하면 하는 거죠.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밖으로 나가 뛰어놀아야 정상이에요. 언제 놀아보겠어요? 아마 우리 애들은 공부를 못할 거예요. 벌써 질려버렸을 테니까. 더 늦기 전에 이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는 경찰 공무원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어머니, 세 살 위 오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아내는 차별 받았다고 생각한다. 오빠만 다닌 피아노 학원, 속셈 학원, 태권도 학원. 그녀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녀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부모님은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독하게 노력했다. 중학교에 올라간 다음부터는 오빠보다 학교 성적이 좋았다. 관심 받고 싶어 노력한 결과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녀가 만족할만한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다 절망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가 대학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부모님이 말했다. 대학 등록금은 스스로 마련해서 다니라고. 오빠도 그렇게 했다고. 오빠 역시 그랬다니 부모님의 말에 따랐다. 오빠가 제대하고 단 둘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짧은 투정을 부렸다. 등록금을 벌면서 학교에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고, 오빠는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오빠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오빠와 자신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그날 저녁,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처음으로 대들었다.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늘 오빠, 오빠, 오빠였어요. 저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한 거죠. 독한 마음을 먹고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았어요. 내 아들, 딸은 차별 없이 키울 거예요.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최선을 다해 교육하려고요.

 

     아이들을 패배자로 키우고 싶지 않아요. 잘 키워서 보란 듯이 세상에 내놓을 거예요. 대학 졸업할 때까지 배우고 싶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지원할 거예요. 그 다음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죠. 아이들이 독립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어요.”

 

***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부모 내면에 상처가 도사리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투수가 손으로 꽉 쥐고 던진 공은 포수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원하는 방향으로 정확히 던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무줄에 묶어 빙빙 돌리다 끊어진 공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날아간다. 누군가에 몸에 맞아 상처를 낸다.

 

     아내가 던지는 공은 손으로 꽉 쥐고 던진 공이 아니라 고무줄에 묶어 빙빙 돌리는 공이다. 아내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아이들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준다. 상처 입은 그녀는 자기답지 못한 방식으로 자녀를 키운다.

 

     그녀 마음에 자리 잡은 감정은 두려움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녀를 억누르고 있다. 아이들이 세상이 뒤처지면 안  된다는 엄마의 왜곡된 신념은 두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엄마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자녀에게는 엄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왜곡된 신념을 건강한 신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남편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도와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역시 두렵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 자체가 두렵다. 그것이 아내와 대화를 단절시키고,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외면하게 만든다. 남편에게는 회피 행동이 보인다.

 

     자녀 교육에 대한 갈등이 일어나면 그는 밖으로 나간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언어폭력을 휘두르면 괴로운 마음을 억누르고  상황을 회피한다. 아내에게 아동학대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남편 또한 아이들을 외면하거나 방치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부모 중 한 사람에게 아동학대 당한 성인은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분명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그가 매질을 당할 때, 자신을 때리지 않았던 부모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아버지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만 어머니가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맞을 때마다 어머니가 집에 없었을 리 없다. 단 한 번도 같은 공간 안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죄 없는 아이는 왜 아버지의 매질을 당해야 했을까?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남편과 사는 아내는 두려움으로 인해 남편에게 맞서지 못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목격하면 침묵하거나 집을 나가 버린다. 아이를 보호해줄 유일한 사람이 도망치는 것이다.

 

     남편이 빨간 망토를 몸에 두르고, 언어폭력에서 아이들을 구해내는 슈퍼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상황을 피하지 말고 아내와 대화해야 한다. 담배 하나 물고 아파트 주변을 서성거리는 동안,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만큼 복잡해진다. 더 이상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치지 마라.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내와 대화하자.

 

     또한 남편은 자녀 교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떠맡기고 있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스트레스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아이들은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남편이 뒤로 물러나면 아내의 짐은 무거워진다.

 

     남편이 퇴근 후에 잠시 돌보는 아이들과 아내가 종일 돌보는 아이들은 완전히 다르다. 종일 돌보는 아이들이 훨씬 감당하기 힘들다. 육아는 ‘아내의 과업’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부부의 공동 과업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남편은 아내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아내의 신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아내 상처를 치유할 사람은 남편이다. 따뜻한 사랑으로 그녀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여 아내와 함께 하라.

 

     이 순간에도 차별 받으며 받으며 성장하는 아이가 있다. 차별 받으며 성장했던 부모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 역시 자녀에게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민한 첫 아이를 마음속으로 밀어내지는 않았는가? 자신과 성향이 너무 다른 아이를 밀어내지는 않았는가? 유독 손이 많이 가는 아이에게 모든 관심을 쏟아 부은 나머지 다른 자녀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닌가?

 

     상처 입은 우리가 어느덧 부모가 되었다. 우리 안에 상처를 보듬어가는 힘으로 자녀 마음속의 상처를 치유하는 부모로 성장하자. 그것이 나와 당신과 책임이자 의무이다.